오마이뉴스(한평 반의 평화)

오래된 아내

divicom 2009. 10. 31. 12:37

▲ 그녀의 잠 못 드는 밤
ⓒ 김수자
글 김흥숙 그림 김수자

머리 하얀 남편이 야근하는 밤
늙은 아내는 집에서 객지를 겪는다
남편 코 울음 배인 침상, 문득 낯설어
아내의 낡은 몸이 낙엽처럼 구른다

그때, 아직 머리 검어 집도 객지도 없던 시절
괜히 남편이 되었나 보다, 괜히 아내가 되었나 보다
괜히 집을 꾸미어 객지를 샀나 보다

십일 월의 밤은 짙고 길어
오래된 아내가 오래된 남편을 그리워한다


가을비가 제법 거세게 내린 밤, 나의 동행은 집에 오지 못했습니다. 그가 없는 이불 속은 한 데처럼 춥습니다. 
잠들지 못하면서도 꿈을 꿉니다. 그가 조그맣고 힘없는 나룻배 되어 거센 물결 위를 떠다닙니다.

처음 만난 날 내 눈 속의 콘택트렌즈를 보았던 그의 눈에 흰구름이 덮이어 수술 날짜를 받았습니다. 
나를 먹여 살리는 일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맑디 맑던 수정체가 온통 구름일까, 마음이 싸합니다. 
어차피 잠이 오지 않으니 다시 일어납니다.

그가 오지 못하는 밤, 온 집안엔 카메라가 설치됩니다. 일거수일투족은 물론 머릿속 생각까지 누군가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 같습니다. 아주 자유롭지만 부자유한 시간, 어두운 집안을 서성이다 다시 잠자리에 듭니다.

그가 없는 자리는 갑자기 넓어 내 몸이 이리저리 구릅니다. 그가 없는 밤, 나는 한 마리 공 벌레입니다. 
꿈은 불면을 채우는 그림인가 봅니다. 오래 보지 못한 어릴 적 친구가 나타나고 근 이십 년 만나지 못한 
옛 직장 동료도 보입니다.

신데렐라의 현실을 깨치는 자정 종소리처럼 새벽이 밝고 또 하루 오늘이 시작됩니다. 앞 산 봉우리는 안개 뒤로 
숨어 보이지 않지만 그 봉우리가 거기 있음을 나는 압니다. 나의 동행도 잠시 시야에서 숨은 것뿐, 그는 내 낮과 
밤의 뿌리입니다.

집 밖에서 밤을 지낸 그가 전화를 거는 오전 8시 30분, 웬일인지 전화가 침묵합니다. 회의 중인가 봅니다. 아니 어쩜 자신이 보낸 이메일에 내가 쓴 답장을 보고 오늘 아침 우리가 대화한 것으로, 전화 통화를 한 것으로 생각하는 건지도 모릅니다.

그처럼 빈틈없던 사람도 변하고 있습니다. 예전처럼 내 기대에 맞춰주지 못합니다. 그 변화의 이유가 노화든 
여유든 게으름이든 불평하지 않습니다. 내가 아니어도 그의 나날이 얼마나 버거운지 잘 알고 있으니까요.

부석한 얼굴을 대충 씻고 문 밖으로 나갑니다. 낙엽이 서둘러 떨어지는 길, 전속력으로 구르는 바퀴 소리가 
요란합니다. 언제까지 푸를 것 같던 은행잎들이 며칠 비에 아주 노랗게 변했고, 플라타너스의 넓은 잎들도 단단히 녹이 슬었습니다. 하늘은 제법 푸르고 구름 또한 한가롭습니다. 내가 길 위를 구르는 속도너머 나무와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건 저 속도에 투신한 동행의 덕이겠지요.

작은 꽃집 앞에 국화 화분들이 유치원 아이들 같습니다. 유난히 쑥스러움이 많은 동행은 한번도 내 손에 꽃다발을 건넨 적이 없습니다. 내 눈이 미칠 곳에 꽂아두고 소리 없이 웃는 게 고작이지요. 소국 한 다발 사 들고 가 그의 눈에 띄게 꽂아두어야지, 소국 빛에 그의 눈 속 구름이 걷히어버렸으면, 하고 생각하다 문득 쑥스럽습니다. 내가 그를 
닮아가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