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는 늘 아픔으로 시작합니다.
지난 일년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와
이틀 동안은 꼼짝없이 누워 지낸 후에
삼일 째엔 안과에 갔습니다.
볼 것 못 볼 것 너무 많이 보느라 지친 눈,
시력은 일 년 어치만큼 나빠져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나가본 종로는 점심을 먹으러 나온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삶의 열기로 이글거리는 무수한 얼굴들,
그 얼굴들도 슬픔, 비굴, 분노 같은 것을 숨기고 있을지 모릅니다.
지난 일 년 우리 사회에 넘쳐흐른 탁류,
누군가는 그 물결을 타고 나아가고, 누군가는 그 물을 마셔
괴물이 되고, 누군가는 그 물결을 거스르느라 지쳤겠지요.
오늘 아침 경향신문의 커버스토리는
오랫동안 노벨문학상 후보자로 회자되었으나
이젠 그 상으로부터 영영 멀어져버린 '원로' 고은 시인의
성추행, 성폭력을 폭로했던 최영미 시인의 인터뷰 기사입니다.
인터뷰는 두 면에 걸쳐 게재되어 여기엔 일부만 옮기지만
시인이 되고 싶은 사람이나, 시가 무엇인지,
시인이 뭣 하는 사람인지 알고 싶은 분들은
꼭 한 번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맨 아래 링크를 클릭하면 기사 전문과 관련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커버스토리]‘썩은 계란의 피라미드’를 깨다
김민아 선임기자 makim@kyunghyang.com
...
“En선생 옆에 앉지 말라고/ 문단 초년생인 내게 K시인이 충고했다/ 젊은 여자만 보면 만지거든.// K의 충고를 깜박 잊고 En선생 옆에 앉았다가/ Me too/ 동생에게 빌린 실크 정장 상의가 구겨졌다……” 한 편의 짧은 시 ‘괴물’은 최영미의 인생을 뒤흔들었다. 최영미의 ‘미투’에 고은은 명예훼손을 당했다며 손해배상 청구소송으로 대응했다.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오르내리는 ‘대시인’은 권력이었다. 문단 주류는 침묵했다. 일부는 고은을 엄호했다.
계란(최영미)으로 바위(고은)를 친 것인가, 라는 탄식이 나왔다. 최영미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내 명예가 그의 명예보다/ 가볍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무슨무슨 상을 받지 않았지만,/ 무슨무슨 상 후보로도 오르지 않은// 계란으로/ 바위를 친 게 아니라,/ 바위로 계란을 깨뜨린 거지// 우상을 숭배하는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썩은 계란으로 쌓아올린 거대한 피라미드를/ 흔든 건 내가 아니라 당신들이었지”(‘바위로 계란 깨기’)
최영미가 옳았다. 법원은 1·2심 모두 최영미의 증언에 신빙성이 있다며 그의 손을 들어줬다. 고은이 상고를 포기하며 지난해 12월3일 최영미의 승소가 확정됐다. 12월27일, 서울 동교동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긴 터널을 빠져나와 새해를 맞는 소회를 물었다. 시를 들려줬다. “길이 보이지 않아도// 나는 다만 이 햇살 아래/ 오래 서 있고 싶다”(‘1월의 공원’ 중에서)
...
2018년 7월. 고은이 명예훼손을 당했다며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미투 이후 백래시(역풍)의 전형으로 거론되던 ‘역고소’다. 8월 기자회견에 나선 그는 단호했다. “개인의 명예만이 아니라 이 땅에 사는 여성들의 미래가 걸려 있으므로 모든 것을 걸고 싸우겠습니다. 이 재판은 그의 장례식이 될 겁니다.”
1년4개월여의 법정싸움 동안, 가장 큰 고비는 언제였습니까.
“변호사 선임이었죠. 한여름이라 법원 휴정기(재판을 쉬는 기간)였어요. 당연히 변호사들도 휴가 기간이었죠. 한 지인이 연락을 해왔어요. 한국여성변호사회(여변)라는 곳이 있다, 아직 변호사 선임을 안 했다면 거기에 하는 게 좋겠다고요. 조현욱 여변 회장을 찾아갔습니다. 사건 내용을 듣더니, 바로 사건을 맡겠다고 하셨어요.”
- 문단 주류의 조력은 거의 받지 못했지요.
“성명 하나 나오지 않았어요. 물론 개인적으로 도와주신 분들은 있습니다. 저의 미투를 지지한다고 공개적으로 표명하신 분은 문정희 시인이었어요. 소송에 걸리기 전에 밥을 사며 격려해주셨지요. 그런데 소송이 시작된 후엔 조용해졌어요. 소송 전 소셜미디어에 저를 지지한다는 글을 올린 분도 글을 내리더라고요. 물론 미래가 창창한, 젊은 시인들의 사정은 이해됐어요. 앞길이 막힐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미 문단에서 자리 잡은 원로·중견 문인들의 침묵은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 왜 침묵했을까요.
“고은이 권력이니까, 괜히 정의감에 나섰다가 피해를 볼까봐…. 고은보다 그를 키운 문단권력이 두려웠겠지요. 그들이 주는 문학상을 못 탈 수도 있으니까요. 제가 인맥이 없기도 하고요.”
- 그 이후에도 문단은 크게 변한 게 없습니까.
“문단에 안 나가서 잘 모릅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가 쉽게 변하는 사회는 아니지요.”
법정싸움을 이어가는 동안, 그는 언론 인터뷰도 자제했다. 소송에 영향을 미칠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용기를 내 지난해 6월 시집 <다시 오지 않는 것들>을 출간했다.
- 시집에 대한 반응이 좋다고 들었습니다.
“7쇄, 1만2000부를 찍었어요.”
- 기존 출판사에서 출간을 꺼려 1인 출판사(이미출판사)를 차렸다고요.
“모든 출판사를 접촉해본 건 아니지만, 한두 군데 접촉해보니 메이저 출판사에선 출간을 꺼린다는 걸 감지했지요.”
시집 <다시 오지 않는 것들>에는 ‘사업자등록’이라는 작품이 들어 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드나들던 머리에/ 계산서와 어음과 물류창고를 집어넣고// 당신, 그대, 님, 벗……/ 구름처럼 잡히지 않는 이름들을 부르던 가슴에/ 공급자와 공급받는 자, 등록번호를 새겨 넣고/ 회계와 세무의 전문가에게 설명을 들어도 아리송/ 공급자와 공급받는 자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업자./ 숫자에 약해 그쪽으론 베개도 베지 않았으나…”
...
최영미는 1992년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첫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1994)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혁명과 사랑에 대한 환멸을 노래했다는 평가를 받은 시집은 59쇄, 50만부를 돌파한 베스트셀러다.
-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영광이자 족쇄일 것 같습니다.
“원래 소설을 쓰고 싶었어요. 소설이 안돼 시로 돌아섰습니다. 얼떨결에 시인이 됐지요. 첫 시집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미움도 받았습니다. 저한테는 안 좋았던 것 같아요. 다른 작가들처럼 단행본 한 권 두 권 내고, 세 권부터 잘되고, 이런 게 정상적인 건데…. 문단이 어떤 곳인지 모르고 실수를 여러 차례 했습니다. 언론을 대하는 일도 잘 몰랐고, 적도 많이 만들었지요. 이른바 ‘솔직하다, 도발적이다’ 같은 이미지에 갇혀 있었습니다. 정신차리고 보니 극복하고 싶어졌어요. ‘도발적’이라는 형용사처럼 저랑 안 어울리는 말도 없거든요. 제가 얼마나 겁이 많은데요…. 차선 바꾸기 무서워 운전도 못해요. 다만 글을 쓸 때만 두려움이 없고, 자기검열을 안 하는 편이죠.”
...
- 다시 태어나도 글을 쓸 건가요. 아니면 사랑하는 축구와 관련된 일을 할 건가요.
“(고개를 저으며) 아니요! 몸 쓰는 일을 하고 싶어요. 축구 감독이나 운동선수가 되고 싶고, 배우를 해보고 싶기도 하고요. 이창동 감독이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시나리오를 쓸 때, 문성근씨의 상대역을 제안한 적이 있어요. 이 감독이 ‘영화 출연하면 최영미씨 인생이 바뀔 것’이라고 했어요.”
- 그런데 왜 안 했습니까.
“대학원(홍익대 미술사학과) 논문 마지막 학기이기도 했고, 영화에 출연하면 제 인생이 바뀐다는 말에 겁이 나더라고요. 시인으로 잘나갈 때라….”
인터뷰를 앞두고 최영미는 시집 <다시 오지 않는 것들>을 보내왔다. 표지 안쪽에 ‘쉽게 행복하시길…’이라고 써 있었다.
- ‘쉽게’ ‘행복하기’는 일종의 형용모순 아닌가요.
“사람들은 보통 행복을 어렵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맛난 것 먹어도 행복하고, 친구들과 이야기해도 행복하지 않은가요. 저는 ‘쉽게 사랑하시길’이란 말도 많이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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