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노년 일기 19: 한복이 무서워(2019년 12월 9일)

divicom 2019. 12. 9. 10:38

어제는 조카의 결혼식이었습니다.

갓난아기 시절부터 성인이 되어 사회생활을 활발히 하는 지금까지 그의 모습을 지켜본 사람으로서

그의 결혼은 아주 많은 감정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연수야, 축하하고 사랑해. 부디 사랑으로 함께 자라고 사랑으로 서로를 키우기를!!)


조카의 할머니인 구순의 어머니는 제게 꼭 한복을 입고 가야 한다고 누차 명령 같기도 하고

부탁 같기도 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머니가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입고 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물론 그때는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을 결심하는 건지 몰랐습니다.


의자를 놓고 올라가 장롱 위 한복 상자를 내리는 일, 상자에 들어있는 한복을 꺼낸 후 상자를 다시 올리는 일,

한복에 바람을 쏘이고 다림질을 하는 일-- 그 어느 것도 쉽지 않았지만 더 어려운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습니다.


한복을 입어보니 치마 길이는 길어 바닥에 끌리고 속치마의 말기는 나이든 몸통에 너무 좁았습니다.

중학교 수예시간에 '38'점을 맞았던 솜씨이지만 바느질을 시작했습니다. 치마와 속치마의 어깨끈을 줄여

치마 길이를 조금 줄이고 속치마 말기에 끈을 달아 묶었습니다. 글로 쓰니 한 문장이지만 그 일을 하는 게

그렇게 힘들 수가 없었습니다. 이력서에 '00신문에서 1977~1989 근무'로 짧게 쓰이는 한 줄이 무수한

달리기와 고쳐 쓰기와 불면과 담배 연기와 좌절을 포함하는 것과 비슷하겠지요.


수선이 끝난 한복을 걸어놓고 잠자리에 누울 때는 자정이 넘어 있었습니다. 

이튿날은 결혼식날. 저희 가족이 어머니를 결혼식장으로 모시고 가기로 했기에 이른 아침부터

서두르고 있는데,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함께 사는 올케언니는 미용실로 가고

어머니는 한복을 입고 계신데 도저히 혼자 치마를 입을 수 없다는 겁니다.

알았다고, 조금 더 일찍 가서 어머니 치마 입는 걸 도와드리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치마저고리를 입고 그 위에 두루마기를 겹쳐 입고 어머니댁으로 갔습니다.

치마를 못 입겠다던 어머니는 잘 입고 계셨습니다. 치마 말기가 예전 것과 달리 현대적으로

만들어져 뭔가를 끼우게 되어 있는데 그걸 할 줄 몰라서 대충 입으셨다며

결혼식장에 가서 둘째 며느리에게 부탁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며칠 전에 한복을 입어보실 때도

둘째 며느리가 아주 쉽게 해주었다는 겁니다.

   

마침내 결혼식장으로 갔습니다. 평소에 결혼식에 갈 때는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지만

한복을 입었으니 승용차를 타고 갔습니다. 어머니에게 야단맞을 각오를 하고, 한복 입는 게 너무 힘들어

다시는 입지 않겠다고 말씀드리니 어머니는 야단치시기는커녕 당신도 다시는 입지 않겠다고 다짐하셨습니다.

어머니에겐 한복을 수선하는 과정이 없었지만 평소에 입지 않던 한복을 입는 것 자체가

구순의 정신과 육체에는 큰 부담이 되신 것이지요.


'노인'이라는 상태는 아무 것도 아닌 듯 보이는 일이 힘겨워지는 때를 뜻합니다.

늘 하던 일만 하고 늘 다니던 곳만 다니면 자신이 얼마나 늙었는지 잘 알수가 없습니다.

낯선 길에 나설 때, 평소에 하지 않던 일을 할 때 잊고 있던 자신의 나이가 코앞으로 다가섭니다.

젊은이들에겐 아무 것도 아닌 듯 보이는 일들이 노인에겐 노화를 일깨우는 거울이 되는 것이지요.


조카딸의 결혼식에 가려고 한복을 입으시다 쓰러지셨던 지수 형님이 떠오릅니다.

손아래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한복 입고 오세요. 한복 입은 사람이 좀 있어야

결혼식이 좋아보여요.' 했었고, 형님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한복을 입고 오시려다 쓰러지셨습니다.

그분이 그날 아침 한복을 입다가 쓰러지실 때까지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내셨는지 

젊었던 우리는 알지도 못했고 알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새로 산 한복을 입는 건 별로 힘들지 않을지 모릅니다.

장롱 위에서 내릴 필요도 없고 거풍이나 다림질의 과정도 없을 테니까요.

그래도 이제 결혼식이나 다른 의례를 앞둔 노인들에게 '한복 입으세요'라고 말하는 건 

삼가야겠습니다. 또 누군가 지수 형님처럼 되는 건 보고 싶지 않으니까요. 


문제는 젊은이들입니다. 아무리 현명한 젊은이도 노인의 상태를 미리 알 수는 없고

아무렇지 않게 '꼭 한복 입고 오세요 한복이 멋있어요.' 라고 말할 수 있으니까요.

누가 제게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할까요? 

'넌 네가 하는 말의 진정한 의미와 무게를 알고 있니?' 라고 반문할까요?

부디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