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노년 일기 17: 우아한 노인(2019년 11월 29일)

divicom 2019. 11. 29. 11:13

언제부턴가 응급차와 소방차의 사이렌 소리가 일상적 소음이 되었습니다.

생활 속에 위급한 상황이 그만큼 많아졌다는 뜻이겠지요. 


오래전 이 세상을 떠난 친구 수희가 떠오릅니다.

아들을 위해 미국 로스앤젤러스에 다녀온 수희를 만났더니 그가 말했습니다.

"거기선 사이렌 소리가 끝없이 들렸어요. 그 소리를 견딜 수가 없었어요."

이미 병중이었던 수희는 그곳에서 돌아온 지 일년 여만에 저 세상으로 갔습니다.


사이렌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 소리를 싫어하던 수희와 그가 누워 있던

단양 사과밭 사이 작은 방을 생각합니다. 

움직일 수 없는 몸을 누인 채 열린 문으로 가을이 물드는 것을 보다 떠난 수희...


사과보다 어여뻤던 수희가 아직 여기 있었다면 사이렌 소리를 피해 자꾸 이사하다가 

결국 사과밭으로 가거나 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갔을 겁니다.

그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행동에 옮기는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저를 포함해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수희와 같은 용기가 없으니

사이렌 소리를 피해 산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드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지금 머무는 곳에 계속 머물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 사이렌 소리의 주인공이 되는 일을 피해야겠습니다.

'위급한 상황'에 처하는 사람이 줄어들면 사이렌 소리도 줄어들 테니

위급한 상황을 예방해야겠습니다.


일터나 도로, 공사 현장 등에서 정해진 법과 규칙을 준수하면 위험이 줄어

위급한 상황도 줄일 수 있을 겁니다.


개인이 위급한 상황에 처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서두르지 않는 게 중요합니다.

걷는 사람은 서둘러 뛰는 사람보다 넘어질 확률이 적듯

매사 여유를 갖고 천천히 먹고 말하고 걸으면 사고의 가능성은 훨씬 줄어듭니다.

사람들은 모두 '바쁘다 바빠'를 연발하지만 사실 세상에는 촌각을 다투는 일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다들 마음이 바쁜 것이지요.


나이든 사람들은 특히 집안에서 넘어지거나 부딪쳐서 응급차를 타는 일이 많다고 합니다.

나이들어 몸의 감각이 예전처럼 예민하지 않은데 젊은 시절의 속도대로 사니

사고가 흔한 것이지요. '늙음'을 거부하지 말고 '우아하게' 늙을 궁리를 해야 합니다.


'우아'는 '느림'에서 나옵니다.

천천히 먹고 천천히 말하고 천천히 걷는 노인, 

누군가 거슬리는 언행을 할 때 발칵 화내는 대신 저 사람이 왜 그랬을까,

내가 저 사람의 화를 부추긴 건 아닌가 생각해보는 노인...

이런 노인들은 우아하게 늙어가기 쉽고, 우아한 노인은 

응급차의 주인공이 되거나 소방차를 부르는 일이 적을 겁니다.


누구보다 우아했던 수희는 우아한 노인이 되는 기회를 놓쳤지만

저는 아직 이곳에 있으니 가능하면 우아한 노인이 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