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때때로 찾아오는 수희가 이맘 땐 아예 떠나지 않습니다.
제 몸무게쯤 될 수박을 들고 평창동 언덕길을 올라오던 모습과
단양 사과밭 사이 오두막에 누워 죽음을 기다리던 모습이
자음과 모음처럼 만났다 헤어졌다 합니다.
"저예요." 전화선을 타고 오는 그의 정갈한 목소리가 그립습니다.
그를 보낸 후 한동안 새벽 어스름 집안 곳곳에서 그를 만났습니다.
수희는 제가 잃어버린 첫 친구입니다. 그는 사십 대에 이승을 떠났습니다.
저는 강남의 삼성의료원을 싫어합니다.
그 병원에선 수희가 제 발로 드나들던 때엔 병명도 찾아내지 못하다가
더 이상 병원에서 할 일이 없으니 퇴원하라고 할 때에 이르러서야 혈액암이라 판정했습니다.
수희만큼 그리운 건 인숙입니다.
손수 키워 다듬고 씻어 보내주었던 대파가 생각납니다.
저는 본래 초록에서 하양으로 가는 대파의 아름다움을 사랑하지만
그의 대파는 제가 본 그 어떤 대파보다 아름다웠습니다.
장협착으로 응급실에 실려간 인숙이 병원에서 한 달이나 머물다 패혈증으로 숨졌을 땐
가슴이 아파 숨을 쉴 수도 없었습니다. 결국 생애 처음으로 심장CT를 찍기도 했습니다.
저는 행당동의 한양대학교 병원을 싫어합니다.
인숙이 숨진 건 의료사고라고 생각하니까요.
육십여 년 생애 동안에 좋은 친구들을 만난 건 큰 행운입니다.
매일이 버거워 친구들을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자주 만나지 않는다고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노인들의 키가 자꾸 줄어드는 건 추억의 무게 때문일 겁니다.
특히 이승을 떠나간 친구들이 가슴 속에 남기고 간 무덤 때문이겠지요.
떠나가는 사람이 늘어나니 무덤의 무게도 늘어납니다.
나날이 걸음을 옮기기 힘들어지다가 어느 날 마침내 그들을 따라가겠지요.
떠난 후에 누군가의 가슴에 무거운 무덤을 남겨 그의 키를 줄이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새가 되어 날아간 김흥숙처럼 남는 친구들의 삶도 오히려 가벼워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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