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전 잠시 '신(神)'이 되었습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제가 잠시 누군가의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을 쥐었다 놓았다는 뜻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신 놀이(playing god)'를 재미있어 하지만
저는 어려서도 '신 노릇'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풍뎅이를 잡아 목을 뺑뺑 돌려 놓고 풍뎅이가 부르르 소리를 내며
돌아가면 박수를 치는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런 아이들과는 놀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때부터 감정이입이 너무 빠르게 이루어졌던가 봅니다.
하고 싶지 않은 '신 노릇'은 주로 베란다에서 하게 됩니다.
화분과 화분 사이에 떨어진 흙과 나뭇잎들을 쓸어내고
물청소를 하다 보면, 죽어라고 달아나는 개미와 거미가 보입니다.
가능하면 죽이지 않고 싶지만 개 중에는 죽을 길로 내닫는 녀석들이 있습니다.
조금 전엔 베란다 창문의 망문에 붙은 곤충의 목숨을 쥔 신이 되었습니다.
각다귀라고 하기엔 기골이 크고 몸통도 굵었고
말벌이라고 하기엔 줄무늬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망문 안쪽으로 들어왔는지 철망 위 아래를 분주하게 오르내리는데
아무래도 밖으로 나가고 싶은 것 같았습니다. 망문 안쪽엔 유리문이 있는데
유리문을 열면 그 곤충이 유리문 안쪽 베란다로 들어올 것 같았습니다.
큰 파리 정도면 두려움 없이 유리문과 망문을 활짝 열어
베란다로 들어오든 밖으로 나가든 알아서 하게 하겠지만
그 곤충은 그러기엔 너무 위압적이고 호전적이었습니다.
한참 지켜보다가 곤충이 망문의 왼쪽 끝에 머물 때 망문 오른쪽을 넉넉히 열어두고
유리문은 닫았습니다. "오른쪽으로 가, 그쪽은 열려 있으니까 그리로 가면 밖으로
나갈 수 있어!" 기도하듯 혼잣말을 하기도 하고 곤충이 알아듣게 큰소리로 말하기도 했습니다.
곤충이 오른쪽으로 가면 "그래, 그거야, 조금만 더 가, 조금만 더!" 하고 외치기도 했지요.
그렇지만 곤충은 오른쪽으로 가다가 다시 왼쪽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한동안 분주하게 망문을 오르내리던 곤충이 지친 듯했습니다.
한 곳에 매달려 움직이지 않는 걸 보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어느 순간 그의 행태가 우리 삶의 은유처럼 보였습니다.
열심히 산다고 잘 사는 건 아니라는 말, 도(道)는 게으름에서 나온다는 말,
시력은 좋아도 시야는 좁다는 말 등, 여러 가지 말이 떠올랐습니다.
조금만 더 가면 살 길이 있는데, 지금까지 다니던 길이 아닌 길로 가야 살 수 있는데...
그가 스스로 들어간 생의 감옥에서 자유로워지지 못하는 건
너무 부지런히 다니던 길을 오가느라 나갈 수 있는 문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겠지요?
누군가 출구가 없는 곳에 닫혔다는 느낌이 든다고 하소연하면
오늘 만난 저 곤충 얘기를 해줘야겠습니다.
아,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이 짧은 글을 쓰는 동안 모기가 양쪽 발에 한 방씩 독한 주사를 놓았습니다.
가을이 시작되도록 오래 살아남아 임신까지 한 모기는 보통 독한 게 아닙니다.
두 발이 찌르르 저리는 것 같습니다.
혹시 호호할머니가 되도록오래 살게 되어도 10월 모기처럼 독해지진 말아야지 다짐합니다.
아무래도 한 번 더 '신 노릇'을 해야겠습니다.
아까는 살리려는 신이었지만 이번에는 죽이는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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