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노년 일기9: 회색의 아름다움(2019년 9월 12일)

divicom 2019. 9. 12. 04:45

저는 새벽 하늘과 비가 그친 후의 하늘을 좋아합니다.

회색의 변주가 가득한 하늘을 보다 보면 회색보다 아름다운 색깔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회색 하늘을 볼 때면 언제나 스코틀랜드가 떠오릅니다.

가본 적은 없지만 제가 번역한 책 <초상화 살인>에서 스코틀랜드를 만났습니다.

<초상화 살인>은 세계에서 가장 '지적(知的)'인 작가 중 한 사람으로 불리는 영국 작가 

이언 피어스(Iain Pears)의 작품으로 화가와 비평가를 통해 사회의 부조리와 사랑, 질투, 복수 등을 그립니다.

이언 피어스는 이 소설에서 스코틀랜드에는 쉰아홉 가지의 회색이 있다고 하는데

가끔은 우리가 사는 나라에도 쉰 가지의 회색이 찾아오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스코틀랜드에선 해를 보는 날이 많지 않다네. 빛도 많지 않고. 우리에겐 쉰아홉 가지의 회색이 있지.

말하자면 스코틀랜드는 회색 나라야. 음울한 새벽과 위협적인 광풍이 몰아치는 아침, 그 둘의 차이 속에서

우린 하느님이 창조한 것을 모두 볼 수 있다네. 제대로 보면 구릉지대의 풀들까지 회색이야. 히스가 무성한 들판도,

호수도 모두 회색이라네. 태양도 회색이니 말이야. 회색은 즉각적인 인상을 주지 않아. 그러니 그런 식으로 

그릴 수도 없지. 몇 년 간, 아니 몇 십 년간 회색을 연구해야 그 색이 품고 있는 비밀을 알 수 있다네..."


'음울한 새벽'부터 '광풍이 몰아치는 아침'까지 세상이 온통 회색 일색일 때 그 색깔들 사이에는 차이가 존재하고

그 '차이 속에서 우린 하느님이 창조한 것'을 모두 볼 수 있다고 하는 구절을 읽으니

나이들어 가는 사람들의 머리칼이 생각납니다. 


젊은이들 눈에는 다 같은 '흰머리'로 보일 노인들의 머리, 그 무수한 회색의 변주 속에는 얼마나 많은 시간과

햇살과 구름과 사연이 깃들어 있을까요? 이언 피어스의 말처럼 '몇 년 간, 아니 몇 십 년간 회색을 연구'하면

그 답을 알 수 있을까요? 


남들은 뭐라고 하든 저는 회색의 변주를 보여주는 제 머리칼을 좋아합니다.

뒷머리 아랫부분은 검은 색에 가깝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흰색에 가까워지는 회색. 

이 아름다운 색을 얻으려고 그렇게 긴 시간을 살아온 걸까요? 

제 마음 속은 어떨까요? 그곳은 어떤 색깔의 변주로 채워져 있을까요?

그곳도 제 머리카락 빛깔만큼 아름다울까요? 그곳을 아름다름답게 하려면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혹시 <초상화 살인>에 그 답이 있을까요?


"...지난 몇 년 동안 난 먼 길을 온 것 같아. 이젠 내가 그리고 싶은 것과 비슷한 걸 그리지 않고,

그리고 싶은 걸 그리기 시작했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