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노년 일기8: 태풍 링링, 그리고 메멘토 모리(2019년 9월 8일)

divicom 2019. 9. 8. 23:44

태풍 '링링' 덕에 나라가 바람 천국이 되었던 어제 잠시 그 바람 속을 걸었습니다.

'윙 윙 링 링' 위협적인 소리를 동반한 바람이 휩쓸 때마다 아직 푸른 

플라타너스의 너른 잎들이 보도로 떨어지고 키 큰 입간판들이 힘없이 쓰러졌습니다.

사람들은 거의 모두 겁쟁이가 되어 문 안으로 숨었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어느 순간 겁쟁이가 됩니다. 

힘 앞에서 겁을 먹기도 하고 위협 앞에서 겁쟁이가 되기도 하고...

용감해 보이던 사람들이 죽음 앞에서 겁쟁이가 되는 일도 흔합니다.

안중근 의사나 윤봉길 의사가 시대를 넘어 추앙받는 이유는

그분들이 죽음 앞에서 의연하게 의지를 관철하려 했기 때문이겠지요.


식물도 그렇겠지만 인간을 포함한 동물은 자연재앙과 죽음 앞에서 겁쟁이가 됩니다.

인간에겐 이성이 있고 지적 욕구가 있어 동물과 다르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어쩌면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죽음을 대하는 태도에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동물은 위험 앞에서 도망치려 하지만 인간은 죽음조차 무릅쓸 수 있다는 것이지요.


생명을 가진 존재 앞에 나타날 수 있는 가장 두려운 대상, 죽음.

어떻게 하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안중근 의사나 윤봉길 의사 같은 특별한 분들에게만 주어진

성인(聖人)의 자질일까요?

저와 같은 보통 사람은 죽음이 동반하는 두려움으로부터 영영 자유로워질 수 없을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안중근 의사나 윤봉길 의사와 같은 영웅들과 달리

보통 사람들은 긴 노년을 산 다음 죽음에게로 가는데

바로 이 노년이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는 법을 터득하는 시기라는 것이지요.


사고가 아니면 죽음은 한 순간에 오지 않습니다.

병에 걸려 죽어갈 때도 죽음은 순간에 오지 않고 한 달, 두 달, 일 년, 이 년...

말미를 두고 진행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맞이할 수 있는,

의연하게 '영웅'을 흉내 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지요.


어떤 경우에나 기회를 잡으려면 평소에 준비해야 합니다.

죽음의 공포로부터 자유로워질 기회도 준비한 사람에게만 주어집니다.

노화가 수반하는 검버섯, 주름, 고통마다 죽음의 힌트가 있습니다.

'Memento mori' 즉 '죽음을 기억하라'는 것이지요.

그 힌트 속에서 죽음을 읽어내며 스스로 명랑하게 죽음에게 갈 길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러면 낡고 병든 몸과의 이별을 거부하고 슬퍼하는 대신

그 몸과의 이별을 즐거워할 수 있을 겁니다. 


죽음, 겁낼 것 없습니다. 지상에 인류가 등장할 때부터 인류와 함께해온 죽음,

죽음은 인류의 가장 오래된 친구입니다.

태풍 '링링'이 아무리 거세어도 노인은 겁낼 필요가 없습니다.

목적지로 가는 길은 여러 갈래이고 '링링'은 그 중 한 갈래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