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정세를 주의깊게 관찰하며 그 변화가 한국에 초래할 영향을 생각하시던 아버지 덕에
해외에 나가 보기 전부터 국제관계를 의식했습니다.
대학 시절엔 박정희 정부의 유신체제에서 '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생각했고,
기자시절 정치부에서 삼년 간 외무부(지금의 외교부)를 출입하면서
한미, 한일, 한중, 한-비동맹 국가들 관계를 주시했습니다.
아이엠에프 금융위기로 인한 가계의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1999년 봄부터 4년 3개월 일했던 미국대사관에서는
좀 더 깊이 미국과 한국, 한미관계를 들여다 볼 수 있었습니다.
국가와 국가의 관계는 개인과 개인의 관계와 다르지 않습니다.
개인 간의 관계도 그렇지만 국가간의 관계도 시작이 중요합니다.
어떤 관계가 갑을관계나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로 시작할 때
가해자였던 국가가 피해자였던 국가를 존중하게 되는 일은 드뭅니다.
피해자였던 국가가 아무리 발전해도, 그 나라를 지배하거나
그 나라를 자기 영향권 아래 두었던 가해자 국가가 그 사실을 인정하고
그 나라를 보는 눈을 바꾸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미국과 일본이 한국을 보는 눈도 그렇게 과거에 형성되었고
여전히 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 오래된 시각을 바꾸기 위해 피해자였던 한국이 해야 할 일은
실력을 키워 국가의 위상을 높이며 당당히 처신하는 것입니다.
피해자 시절처럼 가해자의 눈치를 보거나 복종하면 영원히
가해자-피해자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기분 나쁠 땐 기분 나쁘다고, 실망스러울 땐 실망스럽다고 말해야 합니다.
돈 버는 일에 급급해 '난 정치는 몰라, 난 외교는 몰라'라고 하는 국민이 줄어들고
정치와 국제정세를 공부하는 국민이 많아져야 합니다.
경향신문 조호연 논설주간의 칼럼 같은 글을 쓰는 언론인이 많아져야 합니다.
[조호연 칼럼]한국은 미국이 실망스럽다
“주변국과의 긴장을 악화시키는 행위로 실망스럽다.” 2013년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에 대한 미국의 논평이다. ‘실망’은 불만을 나타내는 4가지 외교 표현 가운데 두번째로 수위가 높다. ‘규탄’보다 낮지만 ‘유감’이나 ‘우려’보다 높다. 그래서 동맹국에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다. 그런데 미국은 한국이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종료를 결정하자 “강한 우려와 실망”이라고 밝혔다. 심지어는 “한국의 조치가 미군에 대한 위협을 증가시킬 수 있다”는 입장문도 냈다. 주한미군 문제에 민감한 한국인들의 정서를 겨냥한 압박 공세다. 이 정도로 GSOMIA가 미국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 건지 의문이 든다.
미국은 GSOMIA 종료로 한·미·일 3각 안보 공조의 균열이 우려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압박 대상이 잘못됐다. 한·일 간 역사문제를 안보문제, 경제문제로 끌고 온 것은 다름 아닌 일본이다. 하지만 미국은 일본이 도발했을 때는 “양국이 대화로 해결해야 한다”며 중립적 입장을 보였다. 선제공격한 일본은 내버려두고 공격당한 한국에 책임을 묻는 것은 부당하다. 애초 미국은 일본을 압박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문제가 이렇게까지 커지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은 한국이 실망스러울지 몰라도 한국은 미국이 실망스럽다.
더구나 미국은 이번 사태의 거의 전 과정을 한국과 공유했다고 한다. 김현종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에 따르면 “하우스(청와대)와 하우스(백악관) 간 실시간 소통했다”. 그러니 한국이 고위급 특사를 2차례 일본에 파견하고, 국장급·장관급 등 각급 실무회담도 여러번 제의했지만 일본이 모두 문전박대한 저간의 사정을 모를 리 없다. 심지어 문재인 대통령이 8·15 경축사에서 대화의 손길을 내밀고, 사전에 이런 내용을 통보까지 했지만 모욕적 무시만 당한 것도 목도했을 터이다. 그런데도 한국의 고민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더 할 말이 없다. 한국은 최선을 다했고, 주권국가로서 절제 있는 대응을 했다. 김 차장은 “GSOMIA 연장을 희망해온 미국이 실망한 것은 당연하다”고 말했다. 그런 견해에 동의할 수 없다. 언제까지 미국의 심기를 고려해 고분고분 처신해야 한단 말인가.
물론 미국이 GSOMIA를 한·미·일 3각 공조의 중요한 고리로 보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에는 GSOMIA가 애물단지나 다름없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안보적 효용성은 낮으면서 한·중관계와 충돌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GSOMIA를 통한 한·일 간 군사정보 교환은 매우 적다. 상황은 분명하다. 동맹으로서 이익의 공통분모를 확대하는 노력은 필요하다. 하지만 미국의 이익을 위해 한국이 일방적으로 희생할 수는 없다. 그것이 일본의 역사 수정주의와 우경화를 묵인해야 하는 것이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냉전 이후 미국은 오랫동안 한·일 갈등에 소극적으로 대처했다. 공산권의 위협이 사라진 상황에서 한·미·일 안보공조 필요성이 약화된 것이다. 한국의 국력신장으로 의존적 한·일관계가 수평적 경쟁관계로 전환되면서 갈등 조정이 한층 힘들어진 것도 영향을 미쳤을 터이다. 사실 미국 입장에서 한·일 역사 및 영토 갈등은 정답이 있는 문제가 아니다. 본질적 해결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미국을 다시 무대로 불러낸 것은 중국이었다. 중국의 굴기에 맞서기 위한 한·미·일 공조의 절박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돌아온 조정자’ 미국의 일본 편들기는 여전했다. 문제는 이런 행태가 동북아 정세의 새로운 갈등요소로 대두되고 있다는 점이다. GSOMIA 사태가 그것을 입증한다. 한국이 종료를 결정했지만 사실상 먼저 걷어찬 것은 일본이다. 한국을 ‘안보상 신뢰할 수 없는 국가’로 낙인찍고, 수출규제와 화이트리스트 제외를 하는 국가와 군사정보를 교류할 수 없는 일 아닌가. 일본은 두 달이 다 되도록 안보 불신 주장을 입증하거나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이 같은 일탈은 미국의 비호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미국의 일본 편들기는 또한 우경화를 부추기고 주변국을 자극하게 된다. 북핵 문제 해결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미국은 성찰해야 한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우리는 한국이 한·일관계를 정확히 올바른 곳으로 되돌리길 희망한다”고 요구했다. 폼페이오 장관에게 묻는다. 그것은 일본에 할 말 아닌가. 또한 미국 스스로에게 할 말이기도 하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한국은 두고두고 미국에 실망하게 될 것이다. 일본은 오늘부터 화이트리스트 한국 제외 조치의 시행에 들어간다. GSOMIA 종료 조치 발효는 3개월 뒤다. 상황은 아직 종료되지 않았다. 정상화를 위한 노력을 중단할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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