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사람을 비롯한 동물들보다 식물을 좋아합니다.
가만히 있기를 좋아하는 기질이 식물을 닮아서일까요?
겨울이 깊어가도 꽃을 피우는 식물들이 있습니다.
아메리칸 블루처럼 추위에 약해 따뜻한 실내에서 꽃을 피우는 식물도 있지만
제라늄처럼 추위따윈 상관없다는 듯 베란다에서
아름답고 뜨거운 붉은 꽃을 연이어 피우는 꽃도 있습니다.
제라늄의 친구 중에 천리향이 있습니다.
천리향 또한 추위를 모르는 듯 한결 같습니다.
몸집은 작아도 기품이 있어 허난설헌의 어릴 적 모습이
이렇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가느다란 갈색 가지에 진초록 잎이 달린 모습이 영원히 계속될 것 같더니
어느 날부터 동공보다 작은 자주빛 봉오리를 내밀었습니다.
언뜻 보면 한 송이의 봉오리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열두 개의 봉오리가 한 송이처럼 보이기도 하고
열다섯 개의 봉오리가 한 송이 같기도 합니다.
매일 아침 베란다에서 그 봉오리들을 들여다보면
제가 천리향을 보듯 천리향도 저를 본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때로 몇 걸음 떨어져 바라보면 그가 창 밖의 먼지 세상을
바라본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여러 날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아침 베란다에 나가니 향기가 흥건했습니다.
수많은 봉오리 중 두어 개가 열렸는데
향기는 베란다를 채우고도 남았습니다.
이제는 매일 새 봉오리가 열립니다.
천리향의 꽃은 제가 본 어떤 보석보다 아름답고
그의 향기는 미세먼지와 배기가스 너머
향기로운 세상의 존재를 암시합니다.
추운 베란다에서, 미세먼지 가득한 세상을 바라보는 그가
어떻게 이렇게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을 피우는 걸까요?
도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영근 것일까요?
우리도 천리향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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