솜씨는 없어도 물건을 잃어 버리거나 그릇을 깨뜨리는 일은 드문데, 얼마 전 오래 쓴 안경을 떨어뜨렸습니다.
깨졌겠구나 했지만 전체가 깨지진 않고 렌즈 아래쪽 안경테와 붙은 부분만 조금 깨져서 계속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제 아침 안경을 쓰려고 할 때 안경테 위쪽이 톡 끊어졌습니다.
그날 아침 신문의 '오늘의 운세'와 '별자리 점'에서 좋은 일이 생길 거라기에 기분이 좋았는데,
안경테가 끊어진 겁니다.
왜 갑자기 끊어지는 거냐고 안경테를 탓할 수도 없습니다.
이십 년도 넘게 썼으니 안경테도 많이 지쳐 있었겠지요.
한쪽 다리가 끊어진 거면 어떻게든 연결해서 써보겠지만
렌즈를 싸고 있는 부분이 끊어져 한쪽 렌즈까지 떨어져 나갔으니 도저히 살릴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그날의 운세 덕분인지 크게 기분이 나쁘진 않았습니다.
워낙 눈이 나빠서 안경을 껴도 외출할 수 있을 만큼 잘 보이진 않으니
아예 안경 없이 살아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콘택트 렌즈를 끼면 안경보다 잘 보이지만 오래 낄 수는 없으니 아침 먹은 후에 끼고 저녁 먹은 후엔 빼야 합니다.
그러니 아침 먹기 전과 한밤중엔 안경이 필요하지만 집안에만 있을 테니 맨눈으로 살아보자는 겁니다.
여기저기 뒤져보니 예전에 쓰던 안경도 있었습니다.
그때는 고도근시용 압축렌즈가 나오기 전이었는지 두꺼운 렌즈가 제법 무거웠습니다.
지금은 렌즈를 세 번 압축, 네 번 압축해서 얇게 만드니 안경의 무게가 많이 가벼워졌습니다.
물론 압축을 한 번 할 때마다 제조비용이 높아지니 네 번 압축한 렌즈를 사용하면
렌즈값만도 10만 원에 육박합니다.
렌즈에 테까지 입히면 거금이 들겠지요.
사정이 이러니 가능하면 안경 없이, 혹은 옛날 안경을 쓰며 살려고 했는데 가족들이 야단이었습니다.
갑자기 독지가가 되어 안경을 새로 하라고 자기네가 돈을 내겠다고 했습니다.
시달리다 못해 안경점에 갔습니다. 아래쪽이 깨지긴 했지만 렌즈는 아직 쓸 수 있으니
테만 바꿔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전에는 사장과 직원이 있었는데 이젠 사장 혼자였습니다.
건물주가 조물주 위에 군림하는 나라이니 월세가 올라 직원을 감당할 수 없게 된 걸까요?
최저임금도 주기 어려워 내보냈을 수도 있겠지요.
학기초라 그런지 손님은 많은데 혼자 감당하느라 바빴습니다.
그래도 서두르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성실히 손님들을 대하는 사장을 보니
그 안경점이 오래 잘 되는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그 주변엔 안경점이 여럿이지만 그 집만큼 손님이 많은 집은 없습니다.
제 차례가 되자 제 얘기를 주의 깊게 들은 사장이 테를 고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렌즈가 너무 작아 그 렌즈에 맞는 테가 없었습니다.
동행한 가족은 렌즈까지 새로 하라고 졸랐지만
사장은 렌즈를 새로 하라고는 하지 않고 열심히 안경테를 찾았습니다.
결국엔 조금 깨진 렌즈를 포기하고 렌즈와 테 모두 새 것으로 안경을 주문했습니다.
다음 주 어느 날 제게 올 새 안경, 아마도 제 생애 마지막 안경이 될 그 안경을 끼고
저는 무엇을 보게 될까요? 별? 구름? 누군가의 외로움?
지금 보이지 않는 것들을 그 안경 덕에 볼 수 있게 된다면 참 좋겠습니다.
그러면 그날의 운세와 별점이 예언한 것처럼 그날이 '좋은 날'이 되고
그 후의 모든 날들도 좋은 날이 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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