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인터넷 바다에서 오래 전에 쓴 글을 만납니다.
전에도 그렇게 만난 글 '생강'을 이 블로그에 올린 일이 있습니다.
그 어느 나라보다 혈연, 지연, 학연 등 인연이 큰힘을 발휘하는 나라...
세 가지 모두를 잊고 살다가 남들 덕에 문득 그런 것에 대해 생각해볼 때가 있습니다.
수필문우사가 발행한 <계간 수필> 2003년 가을호(통권 33호)에 아래의 글을 쓰게 된 것도 그런 연유이겠지요.
글을 읽다 보니 '계간 수필'을 이끄시던 김태길 교수님이 생각납니다.
수필문우회 회원이 아닌 제 글이 계간 수필에 수록된 것도 김 교수님과의 인연 때문일 겁니다.
2009년에 돌아가신 김태길 선생님... 선생님과의 인연이 가을바람처럼 느껴집니다.
ㄱ여고 나오셨지요? 수필문우사 발행 계간 수필 통권 33호 (2003년 가을)
명함을 찍어가지고 다니면서 모모한 인사들을 만나다 보면 가끔 듣게 되는 질문이 있다. “몇 회세요?” 물론
그 질문의 앞에는 “ㄱ여고 나오셨죠?” 하는 질문이 생략되어 있다. “저 그 학교 안 나왔는데요” 하면 “그러면
ㅇ여고 나오셨어요?” 하고 다시 묻는다. “아니요. 거기도 아니에요” 하면 대개들 놀란 눈을 한다.
질문자의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것이 재미있고 이 나라를 괴롭히는 여러 요인 중의 하나인 학연으로부터 다소나마 자유로운 내 처지도 다행스럽다. 게다가 한 학교를 3년 동안 다니는 대신 두 학교를 나누어 다님으로써 학연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는 게 나이들어 갈수록 고맙다.
내가 고등학교로 진학하던 해에는 동계 진학이라 하여 중학교에서 같은 이름의 고등학교로 진학할 때에는 시험을 치르지 않고 몇 개의 유수한 고등학교에 가기 위해서만 따로 시험을 치렀다. 공부에 관심이 없었던 터에 중학교
선생님들의 회유(?)까지 있어 이름 있는 고등학교 시험을 치르는 대신 같은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여느 10대들에게나 마찬가지이겠지만 인생은 무겁고 학교는 지루했다. 게다가 학교가 먼 곳으로 이사를 했기
때문에 버스를 갈아타고 통학해야 하는 것이 또 다른 부담이었다. 재미없는 수업 시간에 영어 소설을 읽으며 근근이 견디는 나날이었는데 음악 시간 때문에 그나마 학교엘 나가기조차 싫어졌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음악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아는 주변 사람들은 깜짝 놀랄 것이다. 나 또한 아름다운 음악이 사람들을 괴롭히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분명 정신적 장애를 갖고 있었을 음악 선생은 언제나 자신이 ‘사랑의 매’라고 부르는 나무 막대기를 한쪽 어깨에
얹고 교실 문에 들어섰다. 그이는 코오르 위붕겐을 가지고 수업을 했는데 악보를 읽고 그것에 맞는 소리를 내는
것이 우리 학생들의 공부였다. 대개는 잘했지만 어느 반에나 음치가 한두 명은 끼어 있기 마련이어서 남들이 ‘파’ 할 때 ‘라’ 하는 아이가 꼭 있었다. 틀릴 것 같으면 소리를 내지 말지 하는 건 우리들의 바람이었고 틀리는 아이들 또한 성실하게 소리를 냈다. 틀린 소리를 듣는 순간 선생의 입가에 어리던 음흉한 미소는 삼십 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를 불쾌하게 한다.
그이는 ‘사랑의 매’를 흔들며 모든 학생들을 일어서게 한 뒤 창가 옆 분단 맨 앞 줄 아이부터 손바닥을 때리기 시작했다. 나는 매 맞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매 맞는 것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사람들은 반문하곤 하는데, 내 말에서 중요한 것은 ‘극도로’이다. 나는 맞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기에 맞을 일은 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숙제가 아무리 하기 싫어도 매를 맞지 않기 위해 최소한은 해냈다. 그러던 사람이 단체 기합이라고 하여 제가 저지르지도 않은 잘못 때문에 매를 맞게 되니 기가 막혔다. 키득키득 하며 손을 내미는 아이들도 적지 않았는데 나는 그 애들의 여유가 마조히즘의 표현이라고 생각했고, 때리는 선생의 입가에 어리던 사디스트의 미소만큼이나 그 키득거림이
싫었다. 선생이 그 미소를 띠고 다가올 때 내 가슴 속에서는 활활 분노와 증오가 타올랐다. 그 불길이 내 눈에도 비쳤던지 선생은 늘 “이놈, 이 눈 좀 봐” 하며 매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음악은 좋아했지만 음악 시간은 끔찍했다.
괴로운 1년이 거의 지나 겨울 방학이 되었을 때엔 정말 살 것 같았다. 그렇게 다니기 싫은 학교라면 도중에 그만두고 검정고시를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지 못했는지 지금으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무튼 방학 중이었고 매우 추운 날이었다. 아버지가 신문에 난 광고를 보여주시는데 ㅂ여고에서 편입생을 뽑는다는 거였다. 광고를 보는 순간 그 학교로 가면 버스를 갈아타지 않아도 되고, 음악 선생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편입시험에 통과했고, 두 개의 자연계열 반 가운데 한 반에 들어갔다. 그 학교의 자연계반은 우열반의 우반 같은 것이어서 학급 아이들의 자긍이 꽤 컸고 더불어 이방인에 대한 텃세도 심했다. 교복집의 실수로 등교 첫날 교복을 입지 못하고 등교한 때문에 겪었던 낭패스런 경험을 필두로 남의 동네에 가서 박대를 당하는 나그네의 나날이
한참 계속되었다. 아이들의 텃세는 지능적이어서 선생들은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했다. 어쩌면 눈치를 챘다 하더라도 모르는 척하는 편이 선생들에게나 나에게나 나았을 것 같기도 하다.
어느 날 담임선생이 “흥숙인 그 전 학교에서 제2 외국어를 뭘 했니? 독어? 불어?” 하고 물은 적이 있었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 하자 아이들이 일제히 “아무것도 안했대!!!” 하고 조소를 섞어 지저귀었다. 그 학교에서는 제2 외국어를 1학년 때부터 가르치는 반면 그 전에 다니던 학교에서는 2학년 때부터 가르쳤기 때문에 나는 아무런 제2 외국어도 배우지 않았던 것이다. 사정을 알고 난 선생이 “그럼 뭐 할래?” 하자 아이들은 다시 “독일어!”, “불어!” 하고 외쳐대었다. 순간적으로 오빠가 독일어 공부를 하던 생각이 나서 “독일어” 라고 말해 버렸다.
독일어 선생은 대학원에 적을 두고 있는 젊은 여인이었다. 나이에 맞게 낭만적이었던 그녀가 어느 청명한 날 야외 수업을 하자고 했다. 교정은 매우 아름다웠고 뒤편에는 언덕까지 있었다. 우리는 모두 그 언덕으로 올라갔다. 봄 분위기에 흠뻑 젖은 처녀 선생은 독일어 책 표지 안쪽에 나와 있던 슈베르트의 ‘들장미’를 가리키며 “누가 좀 불러볼까?” 하고 물었다.
반 아이들이 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아무것도 모르는 선생은 “흥숙이가 누군데 그래? 좀 나와 봐” 했다. ‘누구길래 이렇게 인기가 있을까’ 하는 듯하던 표정이 지금도 떠오른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일어섰다. 아이들의 짓궂은 눈이 다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독일어를 배운 적이 없다는 걸 잘 알면서 내 이름을 외칠 때에는 다 이유가 있었으리라. 그러나 천지신명은 내 편이었으니 나는 그 전 학교에서 합창단원으로서 그 노래를 3절까지 독일어로 외워 부른 적이 있었다. 책을 놓고 선생이 서 있던 너른 바위로 걸어가자 아이들이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Sah ein Knab’ein R.slein stehn, R.slein auf der Heiden…….”
노래가 끝나자 영문도 모르는 선생이 “이렇게 잘하니까 그랬구나” 하며 열렬히 박수를 쳤고, 아이들은 하는 수 없이 선생을 따라 힘없이 손바닥을 두드렸다. 그 뒤로도 한참 배척당하는 나날이 계속되었지만 무시당하지는 않았고,
2학기가 되면서는 다가오는 아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때의 경험이 얼마나 유익한 것이었나를 알게 되었다. 대학에서나 직장에서나 여럿이 한 편인 자리에 홀로 있다는 생각이 들 때는 고등학교 시절이 생각나고 그런 상황이 오래 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생각하며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우리 사회처럼 인연을 중요시하는 곳에서는 학연으로든 지연으로든 힘있는 다수에 속함으로써 편리와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 좋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처럼 이만치 홀로 떨어져 그 다수가 저지를지도 모를 횡포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세상과 사람을 선입견 없이 바라보는 것 또한 재미있는 일이다. 게다가 가끔 “ㄱ여고 나오셨죠?” 하는 사람들을 놀래키며 느끼는 즐거움까지 덤으로 누려볼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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