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이희호 선생, 김대중 선생(2015년 4월 6일)

divicom 2015. 4. 6. 06:39

제게 가장 존경하는 크리스천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저는 주저하지 않고 이희호 선생님이라고 대답할 겁니다. 

신앙이 기복(祈福)으로 전락한 오늘날도 '한결같이' 신앙을 무기로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크리스천들이 이희호 선생님을 흉내 내는 날, 그날부터 우리나라는 달라질 겁니다. 


이희호 선생님이 계셨기에 김대중 선생이 계셨습니다. 김 선생 뒤에 가리어 잘 보이지 않던 이 선생님, 오늘부터 

한겨레신문에서 이 선생님의 평전을 연재한다니, 늦었으나 다행한 일입니다.


언젠가 선생님의 저서 '동행'을 들고 사인을 받으러 갔을 때, 그 부드러우나 힘있던 악수를 지금껏 기억합니다. 

이 선생님, 선생님이 계시어 얼마나 다행인지요. 부디 건강하시어 이 어두운 나라를 밝히소서!

아래에 연재를 시작하는 첫 기사의 일부를 옮겨둡니다. 중간의 말없음표는 기사가 잘렸음을 뜻합니다.

전문은 아래 주소에서 볼 수 있습니다.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685597.html?_ns=t1


이희호 없는 김대중을 생각할 수 있는가
투사를 단련시킨 투사 “시련의 세월에도 늘 한결 같은”

2009년 8월23일 제15대 대한민국 대통령을 지낸 ‘현대 정치사의 거인’ 김대중이 이 땅의 사람들과 영원히 작별했다. 이날 오후 국회를 떠난 영구차는 현충원에 고인을 내려놓기 전 서울시청 앞 광장을 들렀다. 민주주의 수호자의 마지막 가는 길을 보려고 모여든 수많은 시민을 앞에 두고 검은 상복을 입은 노구의 부인이 단상에 올랐다. 슬픔에 젖은 가녀린 몸에 어울리지 않는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광장으로 울려 퍼졌다. 고인과 47년의 삶을 함께한 부인 이희호였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제 남편은 일생을 통하여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피나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많은 오해를 받으면서도 오로지 인권과 남북의 화해협력을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바라옵건대, 남편이 평생 추구해온 화해와 용서의 정신 그리고 평화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행동하는 양심으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이것이 남편의 유지입니다.”

세상을 뜨기 전 김대중은 피로써 이룬 민주주의가 깨져 나가는 걸 보며 독재의 부활을 걱정했다. 2009년 5월23일 16대 대통령 노무현의 갑작스런 죽음을 접하고 자기 몸의 절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검찰을 앞세운 정권의 잔인한 보복이 끝내 전임 대통령의 자살을 불렀다. 김대중은 “노무현 대통령의 자살은 이명박 정권에 의해 강요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일기에 썼다. 김대중은 장례식에서 읽으려고 쓴 조사에서 비명에 간 후배 대통령을 향해 이렇게 소리쳤다.

“노무현 대통령! 당신은 죽어서도 죽지 마십시오. 우리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당신은 저승에서, 나는 이승에서 힘을 합쳐 민주주의를 지켜냅시다. 그래야 우리가 인생을 산 보람이 있지 않겠습니까.”

김대중은 정권의 방해로 이 조사를 읽지 못했다. 6월11일 6·15 남북공동선언 9돌 기념식이 열렸다. 김대중은 아픈 몸을 이끌고 참석해 혼신의 힘을 다해 말했다. “독재정권이 과거에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습니까. 그분들의 죽음에 보답하기 위해, 우리 국민이 피땀으로 이룬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을 다 해야 합니다. 행동하는 양심이 됩시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입니다.” 마지막 생기를 다 모아 쏟아낸 연설을 뒤에 남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김대중은 쓰러졌다. 그것이 영원한 잠의 시작이었다.

김대중은 서울 동작동 현충원의 새로 단장한 묘역에 묻혔다. 장례식 이후 지금까지 이희호는 매주 두 번씩 남편의 묘소를 참배한다. 비가 오는 날도 눈이 오는 날도 빠지지 않았다. 화요일에는 지난날의 동지들, 측근들, 그리고 가족과 함께 남편을 찾고, 금요일에 다시 홀로 묘소를 찾는다. 일이 있어 타지에 갔을 때는 돌아오는 길에라도 들러 남편을 만났다. “남편이 하늘에서도 이 나라 민주주의와 남북의 화해와 세계 평화를 위해 힘써 달라고 기도합니다.” 남편의 몸이 흙으로 돌아갔지만 아내는 남편을 떠나보내지 않은 것 같다.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도 남편을 생각하며 같은 내용으로 기도합니다.” 이희호 곁에는 여전히 김대중이 있다.


이희호의 삶은 김대중의 존재와 떼려야 뗄 수 없이 얽혔다. 그러다 보니 이희호 자신보다는 ‘김대중의 부인’으로 더 알려졌다. 그러나 김대중과 만나기 전에도 이희호는 주목받는 사회운동 지도자였다. 이름이 나는 데 굳이 김대중이라는 존재에 빚질 이유가 없었다. 미국에서 유학한 유망한 사회학 연구자로서 대학 강단에 섰고, 여성문제연구회의 창립을 주도했으며, 대한여자기독교청년회(YWCA)연합회 총무로서 여성기독운동을 이끌었다. 총무로 취임해 활동한 4년 동안 이희호는 여성운동의 새 장을 열었다. 이 나라 여성인권운동 성장의 중심에 이희호가 있었다.

여성의 권리를 위해 싸우던 이희호는 김대중과 부부의 인연을 맺음으로써 삶의 행보가 바뀌었다. 운명은 두 사람을 현대사의 회오리바람 속으로 밀어 넣었다. 두 사람이 걸은 길은 수난의 골고다 언덕이었다. 그러나 아내가 남편을 마냥 뒤따르는 길은 아니었다. 이희호와 김대중이 즐겨 쓴 표현을 쓰자면, 두 사람의 일생은 ‘동행자’, ‘동역자’의 삶이었다. 함께 걷고 함께 일하고 함께 싸우는 삶이었다. 이희호는 김대중의 동지, 가장 깊은 신뢰로 묶인 평생 동지였다. 이희호와 김대중은 동지로서 서로를 일으켜주었고 부추겨주었다.

이희호와 김대중을 잘 아는 사람들은 ‘이희호가 없는 김대중을 생각할 수 있는가’ 하고 자주 물었다. 동행자 이희호가 없다면 정치인 김대중도 있을 수 없다는 뜻이었다. 생전의 김대중 자신이 그런 생각을 가장 분명하게 표현한 사람이었다. 김대중은 1983년 미국 망명 시절 샌프란시스코에서 강연하던 중 이렇게 말했다.아내가 없었더라면 내가 오늘날 무엇이 되었을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오늘 내가 여러분과 함께할 수 있는 것은 내 아내 덕분이고, 나는 이희호의 남편으로서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나는 그것이 너무나 자랑스럽습니다.”

...

이희호가 김대중의 양심을 지키고 키웠다는 사실을 김대중은 아내에 관해 쓴 글에서 솔직하게 밝혔다.

“우스갯소리로 나는 늘 아내에게 버림받을까봐, 나 자신의 정치적 지조를 바꿀 수 없었다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스개가 아니다. 나의 진심이다. 1980년 당시 내가 정권에 협력하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 상황이었다. 쿠데타에 가담했던 실력자가 나를 찾아와 온갖 회유와 협박을 했다. 나도 인간인데 그런 유혹 앞에서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한순간 흔들리던 나의 마음은 아내를 생각하며 올곧게 바로잡혔다. 아내는 결코 나의 배신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아내의 사랑을 잃는다는 것은 내게는 곧 목숨을 잃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나는 아내의 사랑을 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