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신문에서 존경하는 동행 김민기 씨 얘기를 읽었습니다. 가끔 읽는 일이 부끄러움을 느끼는 일이 될 때가 있는데, 그에 대해 읽으면 읽을수록 부끄럽습니다. 그래도 읽어야 합니다. 그가 아니었으면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을지 모르니까요.
이슬은 햇살에 사라지지만, 그가 만든 '아침이슬' 은 갈수록 푸르게 빛나고 있습니다. 한겨레신문에 그를 인터뷰한 긴 기사가 실렸습니다. 여기엔 조금만 옮겨둡니다.
전문은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685444.html?_ns=t1 에서 읽어볼 수 있습니다.
문단 사이의 말없음표는 기사가 잘렸음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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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청년문화의 원형질을 제공한 국내 최초의 싱어송라이터, 콘서트 한번 안 했는데 한국사의 주요 변곡점마다 그의 노래가 불린 사람, 공장 노동자로 농사꾼으로 막장 탄부로 세상 가장 낮은 곳에서 그 스스로 ‘아침이슬’과 ‘상록수’가 되었던 사람, 미술에서 시작해서 노래와 연극과 문학을 아우르며 한국 문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는 사람. 김민기(64), 그는 동시대 그 누구보다도 밀도 높은 삶을 살아왔다.
‘아침이슬’이 담긴 데뷔앨범을 낸 게 그의 나이 만 스무 살 때이니, 이제 환갑을 훌쩍 넘긴 그가 지나온 삶의 아픔과 갈등, 회한과 소망을 담담히 들려줄 때도 되지 않았을까. 그 험한 시대를 가장 뜨겁게 겪어냈으면서도, 가시 돋친 공격성이라곤 없이 유순하고 담담하게 자기 자리를 지켜올 수 있었던 비결은 뭔지, 어떻게 이 남자는 괴물과 싸우면서도 괴물이 되지 않을 수 있었는지 알고 싶었다. 얘기를 어디서부터 풀어가야 할까. 나도 그가 건네는 막걸리 한 잔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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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기는 1951년 전쟁통에 전북 이리(현 익산)에서 10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인민군에 학살당해 돌아가시고 과부가 된 어머니가 유복자인 민기를 낳았다. 원산이 고향인 어머니는 숙명여고를 나오고 연희전문 1기로 입학한 인텔리 여성이었다. 연희전문 시절, 조선학생에 대한 차별에 항의하며 들고일어났다가 퇴학당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조산원(산파) 자격증을 따서 돌아와, 아이 받는 일을 하며 10남매를 키웠다.
-출생부터 파란만장하시다.
“내가 지금 살아 있는 게 기적이지. 어머니는 늘 바쁘시고 형제들은 학교 가고 혼자 놀면서 컸는데, 어려서 제일 무서운 게 뭐였는지 알아? 아이고, 근데 내가 취했다. 자꾸 반말을….”
-편하게 말씀하셔도 된다.(웃음) 제일 무서운 게…?
“제일 무서운 게 문둥이하고 팔다리 잘린 상이군인들이었다. 근데 방학이면 서울에 있는 형, 누나들이 온다고 해서 역에 마중 나가는데, 역에서 그 무시무시한 문둥이들이 우릴 보고 막 다가오는 거야. 굉장히 무서웠다. 근데 그놈들이 어머니한테 인사를 굽실하고… 알고 보니 어머니가 일정 때부터 받아준 놈들이야. 어머니가 그 사람들한테 돈을 받았겠어? 내 말은 세상에 돈 되는 일만 다가 아니다 이거지. 그 전쟁통에 그 아이들 안 받으면 어떻게 할 거야? 돈이 안 돼도 사람이 해야 되는 일은 해야 된다. 내가 아동극을 하려는 것도 같은 이유라고.”
서울로 올라온 그는 서울 재동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경기중학을 거쳐 66년 경기고에 입학한다. 경기중·고 시절 미술반 활동은 그의 “청소년기의 모든 것”이었다. “난 경기중·고를 다닌 게 아니라 경기중·고 미술반을 다녔다”고 말할 만큼.
-그림 그리는 게 그렇게 좋았나?
“경기고 미술반이 프라이드가 무지하게 셌는데, 그때 우리 모토가 ‘정물화는 안 그린다’였다. 미술실에서 앉아서 그리면 안 된다!”
-그럼 뭘 그리나?
“무조건 화판 들고 나가는 거지. 중학교 1학년 때 미술반 선배가 ‘어디서 사과나 꽃병을 그리고 자빠졌어? 나가!’ 해가지고 남대문 시장 좌판에 가서 그리던 기억이 난다. 그거 때문인지, 내가 만든 노래들은 내가 살면서 어딘가 (현장에) 따라가서 이렇게 그린 거야. (그리는 시늉) 단지 붓이 아니고….”
-음악으로 그렸다?
“노래로 그린 거지. <지하철1호선>도 사실은 풍속화야.”
김민기는 69년 서울대 미대 회화과에 입학했지만 그에게 정형화된 미대 수업은 따분할 뿐이었다. 1학년 1학기에 낙제를 한 그는,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 아르바이트 삼아 듀엣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듀엣의 이름은 도비두(도깨비 두 마리). 재동국민학교 1년 후배인 양희은을 만나게 된 것도 그 무렵이다.
-이전의 인터뷰 보니, ‘아침이슬’이나 ‘상록수’ 얘기만 나오면 굉장히 알레르기적인 반응을 보이시던데 왜 그러나?
“그 노래들이 내 몸에서 나간 거긴 한데, 나간 것의 백배가 되어서 돌아오면 내 몸이 버거울 수밖에….”
-87년 시청앞 광장에서 이한열 노제가 벌어질 때 어디 계셨나?
“나, 거기 있었다.”
-어떠셨나?
“앗, 뜨! 뭐 그런 느낌… 백만명이 부르는데, 그 백만명이 다 각자의 마음으로 간절하게 부르는데 내가 그걸 뭐라고 감히 말하겠나? 그때 생각했다. 아, 이건 이제 내 노래가 아니구나.”
71년 발표된 ‘아침이슬’은 그의 험난한 인생의 출발점이었지만, 처음엔 누구도 그 노래의 장대한 후폭풍을 예감하지 못했다. 김민기 1집에 실린 곡 중 제일 먼저 방송금지된 것은 ‘꽃 피우는 아이’. “무궁화꽃을 피우는 아이, 이른 아침 꽃밭에 물도 주었네. 날이 갈수록 꽃은 시들어 꽃밭에 울먹인 아이 있었네”로 시작하는 가사가 화근이었다. 72년 서울문리대 신입생 환영회에서 김민기가 이 노래를 부른 것 때문에 그의 레코드는 전량 압수되고 그는 동대문서로 연행되었다. 그는 불온한 사상범이 되고, 수시로 체포, 고문, 취조받는 일상이 이어졌다. ‘아침이슬’은 그 와중에도 은밀한 바람처럼, 소리 없는 잉걸불처럼 퍼져나갔다. 결국 75년엔 구체적 사유도 명시되지 않은 채 금지곡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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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이나 잡혀갔나?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그게 트라우마로 남지 않던가?
“서소문에 범진사라고 있었어. 보안사 취조실. 들어가니까 하사관들이 딱 들고 오는 게 사각형 각목이었는데 걔네는 베테랑들이지. (패는 시늉) 다다다닥… 그때 아, 내가 죽는구나. 그런 느낌을 처음 받았어. 한참 맞다 보니까 의식이 희미해지면서 패는 놈들 모습이 슬로비디오로 보이는 거야. 나 죽는 거, 아픈 거는 감각이 멀어지고. 근데 걔네들한테 갑자기 미안한 생각이 들더라구.”
-미안했다고?
“한없이 미안해지는 게, ‘나 때문에 이들이 죄를 짓고 있구나’ 생각이 들었어.”
-그게, 몇 살 때인가?
“스물서너살? 그러고 풀려났는데 그때 한참 해방신학이 뜰 때였지. 누가 그러데. 본회퍼 목사가 ‘히틀러는 총으로 쏴서 죽여야 된다’고 했다고. 근데 나는, 죽어가면서 나를 고문한 놈들한테 미안하고 죄송했다고 했다. 그래서 본회퍼 식의 해방신학은 아닌 것 같다 그랬지. 나중에 운동권 애들한테도 그랬어. ‘너무 미워하지 마라. 미워하게 되면 걔 닮아간다.’ 나중에 보니까 박정희 무지하게 미워하던 놈들이 박정희 비슷하게 되더라고. 내 참, 별 얘기까지 다 하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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