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사진과 거울

divicom 2010. 1. 24. 13:16

오빠의 생일을 맞아 부모님과 오빠 가족이 함께 사는 집에 갑니다.  어머니, 올캐 언니, 언니의 며느리, 삼대가  바쁘게 움직이며 온 집안을 맛있는 냄새로 채우고 있습니다. 하릴없이 손님이 된 저는 거실 한편에 놓인 앨범을 집어 듭니다. 원래 사진을 찍는 것도 찍히는 것도 즐기지 않는데다 무엇이나 사진에 담으려 하는 사람들 덕에 사진을 더 싫어하게 되었지만 딱히 할 일이 없으니까요.   

 

한 권은 어머니의 회갑 기념 사진첩이고 다른 한 권엔 최근에 치른 부모님의 회혼례 장면들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니 두 권 사이에는 꼭 이십 년이라는 시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두 권의 사진첩은 그 차이가 사진 속 인물들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보여줍니다. 우선 두 달 전에 있었던 회혼례 사진을 봅니다.

 

많이 약해진 부모님의 안광(眼光)을 대하니 가슴이 먹먹합니다. 앞머리를 잃은 오빠의 이마는 제법 시원하고, 남동생의 머리엔 검은 색과 흰 색이 보기 좋게 섞이어 솔트 앤 페퍼(salt and pepper)의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제 얼굴은 차마 볼 수가 없습니다. 집에서 잘못 자른 덕에 깡충하게 짧은 머리, 그 머리가 강조하는 둥근 얼굴은 눈, 코, 입이 그려진 공 같아 금세 어디로 굴러 갈 것 같습니다.

 

이십 년 전 사진첩 속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직 회갑 전인 지금의 저보다도 젊어 보입니다. 의지와 유머가 배어나오는 밝은 표정이 매력적입니다. 오빠의 앞머리엔 숱이 많고 이제 다 자란 조카들은 아직 빈 칸 많은 원고지 같습니다. 사진 속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반짝반짝, 막 잡힌 야생 곤충처럼 빛이 납니다.

 

무심코 몇 장을 넘기다 보니 맑디맑은 여자 하나가 저를 응시합니다. 여자는 이십 년 전의 저입니다. 한때 제 눈이 이렇게 맑았었군요! 심장이 먽는 것 같습니다. 지난 이십 년을 어떻게 살았기에 이 얼굴이 조금 전 사진첩 속 얼굴로 바뀐 걸까요? 깊은 산속 시내처럼 맑던 눈빛이 어쩌다 도시의 개천 물처럼 되었을까요?

 

맛있는 미역국에 웃음을 곁들여 포식하고 돌아오는 길, 감사의 마음이 솟아납니다. 좋은 형제를 준 부모와 운명에게 감사하고, 맛있는 음식을 준비해준 삼대 여인들에게 감사하고, 무엇보다 거실 한편에서 저를 기다려준 사진첩에 감사합니다. 그 곳에서 본 이십 년 전 제 얼굴, 그 맑은 눈빛이 앞으로 제가 가야 할 길을 얘기합니다. 오래 살면 자기에게서도 배우게 되는 걸까요? 부끄럽지만 하는 수 없습니다. 지금부터라도 헛걸음을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어쩌면 요즘 사람들이 어디서나 사진을 찍어대는 건 오늘 저처럼 반성의 기회를 갖기 위해서일지 모릅니다. 사진이 거울임을 깨달으며 다짐합니다. 남이 하는 일을 내 맘대로 짐작하지 말아야지. 앞으로도 사진을 자주 찍진 않겠지만 언젠가 한 번 찍게 된다면 그 사진 속에서 아까 본 맑음을 다시 보고 싶습니다. 온갖 노화의 징표에도 불구하고 보는 이의 반성을 불러 일으키는 맑음, 그것을 위해 오늘부터 마음과 눈을 닦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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