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눈의 나라 (2010년 1월 6일)

divicom 2010. 1. 6. 12:37

새해 첫 출근길 서울엔 칠십삼년 만에 최대 적설량을 기록하는 눈이 왔다고 합니다. 그래보았자 이십오 센티미터 가량인데 눈(眼) 가는 곳 모두 눈(雪)의 나라입니다. 지저분한 것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세상은 커다란 흰 마스크를 쓰고 소리를 삼킵니다. 오랜만에, 참으로 오랜만에 눈도 귀도 편안합니다.

 

자동차들은 느릿느릿 눈길을 기어가고 사소한 경사로도 심각한 시험대가 되어 버스조차 평지를 찾아 빙 돌아갑니다. 엉덩이만 가린 미니스커트를 입고 호기를 부리던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모두 겨울에 걸맞은 차림입니다. 눈길을 걷는 사람처럼 겸손한 사람은 없습니다. 오랜만에 겸손해진 사람들과, 자연 앞에 작아진 인위를 보니 이런 눈은 며칠 더 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빠르던 것들은 모두 갑자기 늦춰진 속도 앞에 당혹스러워 하는데 원래 느리던 저는 오히려 유쾌합니다. 한달 남짓 전에 잘못 놓인 보도블럭 때문에 다친 왼발 인대는 아직 완전히 낫지 않았지만 조심조심 눈길을 걸어 봅니다. 낮은 담과 빨간 우체통 위에 쌓인 하얀 눈, 가끔 바람을 타고 눈보라로 쏟아지는 나뭇가지의 눈, 너무도 아름다워 한참씩 가던 길을 멈추고 바라봅니다. 안과의사를 놀라게 할 정도로 심한 고도근시에 난시를 겸한 눈이지만 눈의 나라를 볼 수 있으니 감사합니다. 이 아름다운 세상을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들에겐 미안하지만 눈이 며칠 더 와도 좋겠다는 생각이 다시 듭니다.

 

가게들이 늘어선 길, 어떤 집은 영업 중이고 어떤 집은 셔터가 내려져 있습니다. "오토바이로 배달하는 집은 다 문을 닫았어요. 이 옆에 김밥집은 문을 열었다가 닫았고요. 이런 길에 오토바이 다니다간 큰일나요. 저도 늦게야 문 열었는데 그새 오토바이로 배달 다니는 사람이 넘어지는 걸 다섯 번이나 봤어요." 어묵꼬치집 젊은 사장이 겁먹은 목소리로 말합니다. "저도 일찍 들어가야 할까 봐요. 도대체 손님이 없어요." "그러게요... 길에 사람이 없네요." 한 개 먹으려던 어묵꼬치를 하나 더 집어듭니다. 그러고 보니 김밥집도 중국집도 문을 닫았고, 늘 길가에 서있던 땅콩 트럭도 보이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는 그냥 아름다운 대상인 눈이 누구에게는 생계를 위협하는 적이 될 수 있음을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겸손해지는 건 좋지만 눈이 며칠 더 오기를 바라는 건 옳지 않을 것 같습니다.

 

눈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 나무입니다. 가까이 있는 나무나 멀리 흰 모자를 쓴 산의 나무들이나 태연히 아름답습니다. 모든 존재들이 도달한 도(道)의 크기를 재는 기구가 있다면 식물의 도가 동물의 도를 능가하며, 나무의 도가 사람의 도를 능가한다는 게 밝혀지겠지요. 나무의 도가 깊은 것은 무엇보다 선 자리를 떠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땅이 척박하거나 햇빛을 가리는 이웃이 있거나 잠을 방해하는 소음이 있어도 한 자리에 선 채 살아가야 하니 하는 수 없이 도를 닦게 될 겁니다.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재미가 없다고, 이익이 적다고 더 나은 곳을 찾아다니는 사람일수록 도가 낮고 언행이 천박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집으로 가는 언덕길은 어느새 검은 속살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어떤 부지런한 손이 이런 기적을 이루었을까요? 양편에 쌓인 눈의 옹위를 받으며 경사진 길을 걱정없이 오르다 서서 그 손의 주인을 축원하며, 다시 한번 저 아래 끝없이 펼쳐진 눈의 나라를 바라봅니다. 저 칠십삼 년 만의 두께가 혹 하늘이 우리에게 써 보낸 편지의 두께는 아닐까요? 참고 참다가 더는 참지 못하여 펼쳐 놓은 당부의 말씀은 아닐까요? 부디... 침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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