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행동하는 양심

divicom 2010. 2. 8. 07:26

1월의 마지막 주와 2월 초입에 들려온 슬픈 소식 두 가지. 소식의 주인공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 미국 역사학자 하워드 진 (Howard Zinn)입니다. '행동하는 양심'을 주창하고 그렇게 불린 분들입니다. 태어나 산 곳도 직업도 달랐지만 지향점은 같았던 두 분입니다. 

 

하워드 진은 1월 27일 타계했고, 2월 2일엔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의 김 전 대통령 묘소 부근에서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두 가지가 다 애석한 일이지만 제겐 화재 사건이 더 큰 슬픔을 일으킵니다. 같은 한국인인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그분의 생전과 사후, 그분이 견뎌야 했고 여전히 견디고 있는  폭력적 무례 때문입니다. 

 

 현충원 측은 현장에서 삼백 미터 가량 떨어진 박정희 전 대통령 묘역과 무명용사 위령탑 부근에서 김 전 대통령을 친공산주의자로 묘사한 보수단체 (보수기독인 자유수호협의회) 명의의 전단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관할 동작경찰서에서 방화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전담팀을 구성해 "적극적"으로 수사하고 있다니 오래지 않아 화재의 원인이 밝혀지리라 생각합니다. 문득 작년 8월 서거하신 김 전 대통령의 묘역이 현충원에 만들어진 후 이장을 요구하며 '묘역 파헤치기 퍼포먼스'를 벌이던 노인 반공주의자들이 떠오릅니다.  

 

1991년 소련의 해체로 냉전시대는 종말을 고했고 세계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다극화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내부에서도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성과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의 실현을 향한 노력이 진행중이지만, 한국은 여전히 이분법적 이데올로기의 포로입니다. 김 전 대통령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편협한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이 되어, 이 나라에서 여전히 때로는 암암리에, 때로는 공공연하게 진행되고 있는 시대착오적이고 미개한 폭력을 증언합니다. 

 

이 나라는 이데올로기의 갈등으로 인해 무수한 인재를 잃었으나 여전히 생각이 다른 사람을 용공, 좌파, 친공산주의자로 낙인 찍으려 하는 관성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 관성을 앞장 서서 표현하는 건 주로 단순한 정신의 소유자들이지만 때로는 무엇이 옳은지 아는 사람들, 바깥 세상의 흐름을 잘 아는 사람들조차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그런 사람들을 부추기거나 이용하니 안타깝습니다. 

 

 세계 어느 곳에나 반공주의자는 있지만 반공주의자가 존경받는 곳은 없고 그들을 이용하는 세력 또한 존경받지 못합니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를 받는다'는 공산주의의 이상은 '남보다 많이 갖고 싶어하는 인간의 본성'으로 인해 실패했지만, 그 이데올로기의 뿌리를 이루는 '평등'을 도외시하는 사회,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약자와 강자의 차이를 당연시하는 사회는 존경받지 못합니다. 더구나 지금은 '열린 생각의 시대'인만큼 반공이라는 닫힌 이데올로기, 사상으로 범죄자를 만드는 이데올로기의 강조는 웃음거리가 되기 십상입니다.

 

만일 김대중 전 대통령의 묘역을 훼손한 사람들이 바로 그런 반공주의자들이라면 그들은 미국 학자 하워드 진도 친공산주의자라고 부를 것입니다. 그 또한 역사의 주체를 '민중'으로 보았으니까요. 그의 베스트셀러 <미국민중사>를 읽지 못한 사람은 1월 31일자 한겨레신문에 경북대학교의 이정우 교수가 쓴 글을 보면 좋겠습니다. 하워드 진은 21세 때 2차대전에 참전했으며 그때의 경험으로 평생 반전 운동에 앞장섰습니다. 이 교수가 쓴 글의 일부를 옮겨봅니다.

 

  "그는 역사의 주체를 대통령이나 부자가 아니라 민중(노동자, 농민, 흑인, 여성, 이주민, 인디언 등)으로 보았다. 그가 쓴 <미국민중사>는 지금까지 200만부가 넘게 팔린 베스트셀러가 됐고 세계 각국에서 번역돼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의 <미국민중사>는 콜럼버스가 아이티에 상륙해서 원주민을 약탈, 학살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항해자이자 발견자로서 콜럼버스와 후대 계승자들의 영웅적 행위를 강조하고 그들이 저지른 인종 말살을 무시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필요한 일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인 선택이다. 그것은 이미 벌어진 행위를 자기도 모르게 정당화하는 데 이바지한다...  

 

지난해 한국의 용산 참사와 언론 탄압에 항의하는 국제적 서명에 동참했던 하워드 진의 생애 마지막 글은 오바마 대통령의 첫 1년을 평가하는 <네이션>지 기고였다. '미국인들은 지금 오바마의 언변에 현혹되어 있다. 오바마를 더 나은 방향으로 가게 하는 전국적인 운동이 없다면 그는 평범한 대통령이 될 것이며, 우리 시대에 평범한 대통령이란 위험한 대통령을 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닫힌 생각의 소유자'들이 현충원 잔디에 불을 지른다 해도 잔디는 다시 푸르게 자라날 겁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소통의 도구들이 발전할수록, 세상의 문들은 점차 열려 '닫힌 생각'은 '쓸모없는 생각 (obsolete idea)'과 동의어가 될 것입니다. 묘역을 훼손할 순 있어도 "행동하는 양심"을 훼손할 순 없습니다. "행동하는 양심"은 역사가 계속되는 한 살아남아 인간의 타락을 경계할 겁니다. 편협한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사람들조차 마음 속 깊은 곳엔 '양심'이 있을 겁니다. 부디 그들이 생애의 어느 순간 그 양심의 발현을 볼 수 있기를 고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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