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문장

또 하나의 부끄러운 기록 (2013년 11월 6일)

divicom 2013. 11. 6. 11:30

제 세대는 제 부모 세대와 달리 식민지 시절이나 전쟁을 겪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부끄러운 역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독재정권과 맞서 싸우다 생명을 잃은 분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우리 세대는 여러 가지 치욕스러운 일들을 겪으면서 노년에 이르렀습니다. 


1958년 이승만 대통령이 진보당을 해산시키고 이듬해 진보당 당수였던 조봉암 선생을 사형시킨 일도 그 치욕 가운데 하나입니다. 물론 그 모든 부끄러움이 결국 1960년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2011년 1월 대법원이 재심을 통해 억울하게 희생되었던 조봉암 선생에게 무죄 판결을 내리기에 다시는 이런 식의 부끄러움이 반복되지 않을 줄 알았는데 법무부가 통합진보당 해산을 청구했다고 합니다. 대통령이 서울을 비운 사이에 그의 충신들이 저지르는 짓이라 해도 역사는 이 일을 대통령의 이름으로 기록할 겁니다.


세계 어느 곳에서도 이제는 통하지 않는 매카시즘이 여전히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는 나라가 바로 한국임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아무리 남북이 분단되어 있다 해도, 정권과 다른 이념을 좇는다고 해서 국민이 선출한 국회의원까지 있는 정당을 해산하려 한다는 건 무식하고도 뻔뻔한 일입니다. 내년 봄에 무슨 일이 있으려고 이러는 걸까요? 아래는 이 사안에 대한 오늘 한겨레신문의 사설입니다.




진보당 해산 시도, 절차·근거 무시한 권력의 폭력

 

정부가 5일 헌법재판소에 통합진보당(진보당) 해산심판 청구안을 제출하면서 내건 이유는 헌법의 자유민주주의 기본질서 수호. 진보당의 강령 등 당의 설립 목적과 일부 활동이 헌법 질서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정부의 이번 결정이야말로 박근혜 정부가 헌법적 가치가 무엇인지 알고나 있는지, 그리고 그 가치를 수호하려는 의지가 있는지 심각하게 되묻게 한다.


민주주의에서 정당 활동의 자유야말로 가장 중요한 헌법적 가치에 해당한다. 정당 및 정치세력에 대한 판단은 전적으로 국민의 몫이며, 정당 존립 여부는 선거를 통해 유권자들이 표로 결정한다. 정부가 편향된 시각에 함몰돼 특정 정당을 해산하겠다고 덤비는 것이야말로 국민의 선택권 등 헌법에 보장된 가치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행위다. 정부의 이번 결정은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드는 심각한 권력 남용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법무부가 밝힌 진보당 정당해산 심판 청구 경위를 읽어보면 더욱 기가 막힌다. 정당해산이라는 복잡다단한 법률적 사안에 대해 여론조사 결과를 끌어들인 것부터 황당하지만 여론조사 주체를 보면 더 가관이다. <티브이조선> <제이티비시> <문화일보> 등 극우 매체 일색이다. 특히 선정·편향 보도로 여론의 지탄을 받고 있는 종합편성채널에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를 정당해산 청구 결정의 중요한 근거로 삼았다는 대목에 이르면 할 말을 잃는다.


법무부가 저명 헌법 교수와 전직 헌법재판관 자문 결과 모두 심판 청구 필요성에 공감했다고 밝힌 대목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자기네 입맛에 맞는 전문가들만 골라서 자문을 했다고 해도 이런 민감한 사안에 대해 모두 공감했다고 말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법조계의 다양한 견해를 외면한 외눈박이자문은 스스로를 속이고 전문가들을 속이고 국민을 속이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더욱 쓴웃음이 나오는 것은 진보당 해산 이유를 설명하면서 북한식 사회주의운운했는데, 법무부가 주장하는 모두 공감이야말로 북한식 100% 찬성 선거를 연상케 한다는 점이다.


정부가 정당해산 심판 청구라는 무리수를 들고나온 것은 이석기 의원 사건으로 진보당에 대한 국민 여론이 악화된 것을 호기로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 사건과 진보당의 연계가 확실히 증명된 것도 아니고, 사법부의 판단도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다.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사건에 대해서는 사법부의 판단을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진보당 해산에는 서둘러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것도 자가당착이다. “진보당이 선거제도와 의회제도, 정당제도를 부정하는 정당이라는 정부 주장 역시 진보당이 선거를 통해 원내에 한 석이라도 더 진출시키려 안간힘을 써온 사실을 고려하면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의 과거 역사를 돌아보면 권력의 폭력적 광기가 자유민주주의 수호라는 외피를 쓰고 나타날 때가 가장 위험하다. 유신체제는 가장 생생한 예다. 그런데 그런 모습을 박근혜 정부에서 다시 목도하고 있다. 게다가 정부의 이번 조처는 대선 기간 이정희 진보당 후보의 날선 공격을 받았던 박근혜 대통령의 개인적 감정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하다.


정부의 권력 남용과 헌법 무시 행위를 제어할 의무는 이제 헌법재판소의 몫이 됐다. 우리 사법부는 유신시절 권력의 뜻을 좇아 법과 양심을 저버린 행위에 대해 아직도 반성문을 쓰고 있다. 헌재가 뒷날 또다시 그런 반성문을 쓰는 일이 없도록 올바른 결정을 내리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