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칼럼

조두순의 나라 (2009년 10월 12일)

divicom 2009. 12. 29. 19:23

한국은 우리나라가 아닙니다. 여덟 살에 성폭행을 당해 여덟 시간 동안 수술을 받고도 회복 불가능한 몸을 갖게 된 나영이의 나라도 아니고, 네 살부터 친아버지와 오빠에게 2년 가까이 성폭행을 당한 지혜의 나라도 아닙니다. 등굣길의 어린이를 강간하고 증거를 없애기 위해 아이의 장기까지 훼손한 조두순의 나라입니다.

술 취한 재범자 조두순이 ‘심신미약’ 상태에 있었다며 12년 형을 선고한 판사들의 나라입니다. 12년 형이 무겁다며 항소한 조두순의 나라이고, 12년이면 되었다고 항소를 포기한 검찰의 나라입니다. 작년 이 나라에선 1,220건의 아동성폭력사건이 일어났으니 하루에 3.3건입니다. 나이를 조금 높여 20세 이하 피해자 통계를 보면 2,552명, 하루 평균 7명, 3시간 30분당 한 명씩 성범죄의 표적이 된 겁니다. 성폭력을 당하는 13세 미만 어린이가 해마다 10퍼센트씩 늘어나는 나라입니다.

범죄의 끔찍함도 끔찍함이려니와 이 사건이 분노를 일으키는 또 한 가지 이유는 이 사건이 다른 무수한 성범죄들과 마찬가지로 개인적 비극으로 묻힐 수 있었다는 겁니다. 작년 12월에 일어난 사건이 이제야 언론의 조명을 받게 된 건 조두순의 항소 때문이고, 전자발찌 도입 1주년을 기해 이 사건을 재조명한 KBS 1텔레비전의 ‘시사기획 쌈’ 덕택이니 말입니다.

조두순 사건 1심 담당 재판부의 상급법원인 수원지법 이재홍 법원장은 지난 주 국정감사에서, 범행 전날 여러 곳에서 오랫동안 술을 마신 데다 평소 심한 알코올 중독 증세가 있었던 조두순에게 심신 미약에 따른 감경의 증거가 있었으므로 12년이라는 형량이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했습니다.

보건복지가족부의 ‘2007년 아동청소년대상 성범죄자에 대한 양형분석결과’에 따르면, 형이 확정된 아동·청소년대상 성범죄 1,839건 중 42.1퍼센트인 774건에서 벌금형이 선고되었고, 30.5퍼센트인 562건에서는 집행유예가 선고되었습니다. 13세미만을 강간한 범인들의 23.2퍼센트와 13세미만을 강제 추행한 범인들의 48.4퍼센트도 집행유예로 풀려났습니다. 한나라당 주성영 의원에 따르면 작년엔 13세 미만 아동 대상 성범죄로 기소된 549명 중 217명만이 1심에서 징역이나 구류 등 자유형(자유를 박탈당하는 벌)을 선고받았다고 합니다.

민주당 최영희 의원은 13세미만 대상 아동 성폭력범죄자에 대해 집행유예를 제한하고, 피해자가 성년이 될 때까지 공소시효를 정지하는 내용 등을 담은 ‘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으나, 법무부의 반대로 통과되지 못했다고 합니다.

성폭력(성추행도 폭력의 일종입니다)을 당한 사람은 영원히 그 기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몸은 회복되어도 마음은 회복되지 못합니다. 어린 시절 성폭력을 당한 사람이 어른이 된 후 복수에 나선 경우는 김부남 사건만이 아닙니다. 상담과 심리치료의 도움으로 그런 일을 당한 게 내 잘못이 아니었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되거나, 가해자를 용서하게 된다 해도, 기억은 영영 지워지지 않습니다. 더구나 나영이처럼 회복이 불가능한 신체적 훼손까지 겪은 경우, 그 고통과 분노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조두순이라는 사람이 지금과 같은 존재가 된 것이 오롯이 그의 잘못만은 아닐 겁니다. 사람을 파괴하는 데서 기쁨을 느끼는 유전자를 갖고 태어났을 수도 있고, 지난 50여 년의 삶이 너무도 고통스러워 심성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왜곡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지금 그는 반성도 후회도 할 수 없는 존재로 보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성범죄자는 격리시켜야 한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치료해주어야 한다고 하며, 어떤 사람들은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합니다.

마침 지난 토요일은 ‘세계 사형폐지의 날’이었습니다. 사형은 전 세계 139개국에서 폐지되었거나 10년간 집행되지 않았습니다. 작년에 사형을 집행한 나라는 미국과 중국을 비롯해 25개국뿐이라고 합니다. 한국은 2007년 12월 30일자로 ‘10년간 사형을 집행하지 않은 나라’로 분류되었습니다. 어느 나라보다 사상범과 정치범 사법살인이 많았던 나라의 국민으로서 저는 누구보다 사형을 반대해왔고 지금도 반대합니다.

사형폐지 운동을 이끌어온 이상혁 변호사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조두순 사건과 사형제 부활은 ‘다른 문제’이며, 2년 전 실질적 사형폐지국이 된 한국이 다시 사형을 집행하는 건 역사의 수레바퀴를 되돌리는 ‘바보 같은 행동’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변호사는 ‘사형집행은 국가의 격을 떨어뜨리는 일’이라며 다음 달 헌법재판소에서 사형제가 위헌이라는 결정이 내려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습니다.

저로선 사형을 집행하는 것과 성범죄자들에게 관대한 것, 둘 중 어느 것이 더 국가의 격을 떨어뜨리는 일인지 궁금합니다. 이 변호사는 또 “모든 생명은 존엄하며 선과 악에 따라 목숨의 가치가 달라지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건 지향점이지 현실은 아닙니다. 현실에서 생명의 존엄성은 그 생명을 대하는 다른 생명들의 태도에 의해 결정됩니다. 나영이의 생명은 조두순의 눈에 존엄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사형은 반대하지만 범죄 행위가 명명백백한 성범죄자들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는 건 찬성합니다. 그들이 언제 사형될지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시달리며 자기들로 인해 평생 괴로움 속에서 살아가는 피해자들을 생각하기를 바랍니다.

한때는 법관이나 검사를 높이 보았습니다. 불의를 벌하고 정의를 실현하려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누군가 법관이 되었다, 검사가 되었다고 하면, 안정된 생활을 하겠네, 하는 생각이 들 뿐입니다. 가끔 이번처럼 얼토당토않은 판결이나 결정을 내려놓고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자위하는 판사나 검사를 보면 ‘사형수의 아버지’로 불리던 *김홍섭 판사(1915-1965)를 생각합니다.

1961년 10월 12일 당시 광주고법원장이던 김 판사는 경주호 납북기도사건의 항소심을 맡아 3명의 피고에게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경주호 사건은 북한으로 가려는 사람들이 배를 납치, 난동을 부리며 살인을 저지른 사건으로, 1심에서 피고인 22명 중 5명에게 국가보안법위반죄와 해상강도살인죄로 사형이 선고되었고, 항소심에서는 3명에게 사형선고가 내렸다고 합니다. 사형을 선고한 후 김 판사는 묵념하는 자세로 5분가량 머리를 숙이고 있다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눈으로 보시면 재판장석에 앉아 있는 나와 피고인석에 서 있는 여러분들 중 어느 편이 죄인일지는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불행히 이 사람의 능력이 부족하여 여러분을 죄인이라 단언하는 것이니 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김 판사에게 선고를 받은 피고들은 사형을 선고 받아도 원망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김 판사는 인간애를 담은 신중한 태도로 재판을 이끌어 피고인들이 대부분 승복했지요. 법정에서 하는 그의 말은 천근의 무게를 가지고 사형선고 받은 피고인들까지 울게 만들었습니다.” 전 광주고법원장 장순용 변호사의 증언입니다.

김 판사가 1960년에 발표한 ‘刑의 量定에 관한 小考’라는 논문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형벌이 인간의 착각, 무사려, 경거, 편집, 때로는 고의와 조작에 의해 과용, 남용 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언제 어떻게 補塡(보전)되고 회복되어질 것인가. 오늘날 대다수의 법관이 죄책과 형벌을 저울질할 때 최선을 다했다는 것으로 자위를 삼거나 타성과 인습 속에 안주, 체념하고 있는 경향은 없다고 할 만한가.”

조두순에게 법정최고형을 선고하면서, 그 사람의 불운 -무수한 불운으로 인해 그가 이렇게 무서운 범죄를 저지르는 인성을 갖게 되었다면 - 에 대해 진실로 가슴 아파하며, 재판장석의 자신과 피고인석의 조두순 중 누가 더 죄인일지 알 수 없다고 토로하는 판사들이 있었다면, 이 나라는 ‘조두순의 나라’가 아닌 ‘우리나라’가 되었을 겁니다. 가슴은 없고 머리만 있는 법조인들의 나라, 참 부끄럽습니다.

*김홍섭 판사에 대한 기술은 1985년 삼민사에서 출간한 삼민신서 18권 <법에 사는 사람들>에서 따온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