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칼럼

731부대 (2009년 11월 11일)

divicom 2009. 12. 29. 19:32

정운찬 총리가 지난 주 국회 외교·통일·안보 분야 대정부질문에서 731부대를 ‘항일 독립군부대’라고 했다가 곤욕을 치르고 있습니다. 자유선진당의 박선영 의원이 국군포로와 납북자 송환에 대한 정부 정책을 물으며 마루타와 731부대를 아느냐고 묻자, 마루타는 전쟁포로, 731부대는 항일독립군인 것 같다고 대답했다는 겁니다. 부디 어린 학생들은 이 사실을 몰랐으면 좋겠습니다. 역사를 몰라도 총리가 될 수 있구나 하고 생각하면 안 되니까요.

정 총리는 박 의원의 질문이 끝나고 한나라당 김동성 의원이 질문하는 도중 “조금 전 박선영 의원의 질문에 급히 답변 드리는 과정에서 문장을 마치지 못해 731부대와 관련, 항일독립군이라는 표현을 썼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뒤이어 ‘메모를 보며’ 731부대는 일본이 항일독립군에 치명적 타격을 가한 세균전을 위해 운영하던 부대라고 정정했다고 합니다.

인터넷에선 총리가 제 나라 사람들을 생체실험 도구로 이용한 일본 부대를 ‘항일독립군’이라 했다고 비난이 빗발칩니다. 민주당의 송두영 부대변인은 정 총리 발언 후 “너무 황당해 말문이 막힌다. 국제 망신거리다. 외신에 보도될까 더욱 염려스럽다.”라고 했습니다.

송 부대변인은 또 “정 총리는 오늘 나치를 레지스탕스라고 말한 것과 같다”며, 731부대는 일제 관동군 산하 세균전 부대로 전쟁포로와 민간인 3,000여명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자행했다고 덧붙였습니다. 원래 그만큼 알고 있었는지, 정 총리의 발언이 문제가 된 후 찾아보아 안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송 부대변인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만주국 군관에 지원하면서 혈서를 제출했다는 기사가 실린 만주신문이 공개됐다며, “정운찬 총리가 박정희 전 대통령이 독립군에 지원한 것으로 잘못 알고 계실까봐 더욱 염려된다.”고 비꼬았습니다.

정운찬 씨와 마찬가지로 서울대학교 경제학 교수와 총장을 지내고 국무총리를 지낸 이현재 씨는 오래전, 자신이 가졌던 여러 가지 직책 중에 서울대학교 교수 자리가 제일 좋았다고 했습니다. 총장은 행정을 해야 하니 신경 써야 할 게 많고, 총리는 정치인의 자리이니 탈도 많고 말도 많지만, 서울대학교 교수는 어딜 가나 대우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30여 년 동안 대우 받는 자리에 있던 정 총리가 자신을 제대로 대우하지 않는 국회의원들의 속사포 질문에 당황하여 731부대와 마루타에 대해 ‘실언’을 하게 된 건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정 총리의 말처럼 “급히 답변드리는 과정에서 문장을 마치지 못”해 초래된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또 다른 가능성은 정 총리가 731부대와 마루타에 대해 정말로 몰랐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1948년생인 정 총리가 고등학교에 재학하던 1960년대에는 731부대와 마루타에 대해 밝혀진 게 별로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만주국 군관이 되면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 목숨을 다해 충성하겠다고 호소했던 박정희 대통령 치하였으니 밝혀진 게 있었다 해도 교육과정에는 포함되지 않았을 겁니다.

독자 중에도 모르는 분이 있을 수 있으니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731부대는 2차 중일전쟁(1937-1945)과 2차 세계대전 중 비밀리에 세균전에 대한 연구와 개발을 수행하던 일본군 부대입니다. 2002년 12월 중국에서 열린 ‘세균전 범죄에 대한 국제 심포지엄’에서는 일본의 세균전과 인체 실험으로 인해 사망한 사람이 58만 명에 이른다는 발표가 있었습니다.

‘통나무’라는 뜻의 ‘마루타(丸太)’는 사람을 실험대상으로 삼은 잔인한 프로젝트의 암호명이며, 그렇게 부른 이유는 일본군이 지방당국에 그 실험시설을 제재소라고 알렸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시다시피 일본은 1932년 3월 1일 만주를 접수하여 만주국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니 1939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만주국 군관에 재도전했다는 건 바로 일본군에 지원했다는 뜻입니다.

실험대상은 평범한 범죄자부터 항일 빨치산, 정치범, ‘의심스러운 행동’을 하는 사람들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 선발했으며, 어린 아기, 노인, 임신부도 있었다고 합니다.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피디아에는 95퍼센트의 희생자가 중국인과 한국인이었으며, 나머지 5퍼센트는 동남아시아와 태평양제도에서 온 사람들과 소수의 연합국 출신 포로들이었다고 나와 있습니다. 일본군은 이들을 마취도 없이 생체실험에 이용했으며, 일부러 온갖 질병에 감염시킨 후 병이 인체에 끼치는 영향을 연구했는가 하면, 임신부를 실험하기 위해 의사들이 여자들을 임신시키기도 했다고 합니다.

유아사 켄이라는 일본인 의사는 2007년 일본에서 발행되는 영문 일간지 ‘재팬 타임스(The Japan Times)’에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처음에 생체실험을 할 때는 두려웠으나 두 번째부터는 훨씬 수월했고 세 번째에는 기꺼이 하고 싶었다.” 그는 의사들을 비롯해 1,000여 명이 중국 본토에서 이런 실험에 가담했다고 말했습니다. 731부대가 8개 부서에 3,000명을 가진 조직으로까지 확대되었었다는 보고도 있습니다.

교수는 전문직이라 자기 분야 이외의 사안에 대해서는 모르는 경우가 많지만 그렇다고 비난을 받거나 수모를 겪진 않습니다. 그러나 총리는 다릅니다. 엊그제 국회 교육·사회·문화 분야 대정부 질문에서 정 총리는 “총리 된 지 이제 한 달 됐는데, 어떻게 모든 걸 다 알 수 있느냐”고 반문했지만 총리와 대통령은 역사를, 적어도 제 나라의 과거와 현재를 알아야 합니다. 그걸 알아야 나라의 미래를 바른 방향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아니 총리와 대통령만이 아니라 공직에 있는 사람들, 국민이 내는 세금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은 모두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공무원을 뽑을 때 국사(國史) 시험을 치러야 합니다.

이상한 것은 행정안전부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고급공무원 시험과목에 국사가 빠져 있다는 겁니다. 6·7·8·9급 시험엔 들어있는 ‘한국사’가 5급 시험엔 없습니다. 예를 들어 외교통상직렬(외무고등고시)의 1차 시험엔 언어논리영역, 자료해석영역, 상황판단영역, 영어가 필수 과목이고, 2차 시험 필수과목은 영어, 국제정치학, 국제법, 경제학, 선택 과목은 독어, 불어, 러시아어, 중국어, 일어, 스페인어중 하나입니다. 행정고등고시도 그렇습니다. 고급공무원은 한국사와 같은 개별 과목 지식보다 자료를 해석하고 상황을 판단하는 등의 능력이 더 중요하다는 판단 아래 2005년부터 한국사 시험을 폐지했다고 합니다.

역사를 모르면서 자료를 정확히 해석하고 상황을 바르게 판단할 수 있을까요? 저는 공무원들, 특히 고급공무원들은 누구나 국사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 총리처럼 머리가 좋고 공부 잘하던 학생도 나이가 들고 자기 전공과목에만 매달리게 되면 중고교시절에 배운 국사를 잊기 마련입니다. 특히 외국에서 열심히 유학 생활을 한 사람이 제 나라에 대해 갖고 있던 지식을 잃는 건 쉬운 일입니다. 사람의 기억 능력엔 한계가 있으니까요. 그러니 시험을 치러 고급공무원이 되었든 정치적으로 임명이 되었든 모두 국사교육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많이는 몰라도 대부분의 국민이 알고 있는 만큼은 알아야 국민이 생각하는 것과 아주 다른 판단을 내리지 않을 테니까요.

너무나 바빠서 따로 교육 받을 시간이 없다면 우선 이제 막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을 일독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친일의 기록을 읽으며 항일의 역사를 생각하다 보면, 일본군 부대를 항일독립군이라고는 하는 식의 실언은 하지 않을 테니까요. 교수를 하다 죽은 사람의 묘비에도 "OOO학생지묘"라고 쓰는 건 살아있는 사람은 누구나 배워야 한다는 의미일 겁니다. 학생이 되는 걸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총리든 누구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