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칼럼

하토야마와 오바마 (2009년 9월 4일)

divicom 2009. 12. 29. 19:16

지금 지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다 사라진 먼 훗날, 2008년과 2009년은 매우 의미 있는 세계사적 변화들이 이루어진 시기로 기억될 겁니다. 경제위기로 인해 소위 자유 시장경제와 세계화(Globalism)에 대한 반성이 일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에선 역사상 처음으로 흑인 대통령이 탄생했고. 일본에선 54년 만에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으니까요. 그야말로 혁명의 시대라고 할 만 합니다. 혁명은커녕 뒷걸음질을 친 나라들도 있지만 역사는 그런 나라엔 관심이 없습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하토야마 유키오 차기 일본 총리는 매우 다른 개인사에도 불구하고 보수정권을 패배시키며 집권을 했고 사회적 약자를 배려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바로 그 이유로 하토야마가 자신을 ‘일본의 오바마’라고 표현했을 겁니다. 다양한 인종과 가계가 혼합되어 ‘작은 유엔’이라 불리는 오바마의 가족과 달리, 하토야마는 4대째 일본의 정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온 가문의 일원입니다. ‘일본의 케네디家’로 불리는 하토야마 가문은 바로 자민당을 창당한 가문이기도 합니다.

미국 주도의 세계화에서 벗어난 동아시아 공동체를 주창하는 하토야마의 등장이 오바마 정부의 신경을 거슬리지 않을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인구와 비슷한 수의 무보험자를 위한 의료보험 개선에 착수해 기득권층의 반발과 싸우고 있는 오바마에게, 자신과 비슷한 가치관을 가진 하토야마의 집권은 우군의 등장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오바마는 어제 새벽 하토야마에게 전화를 걸어 12분간 통화했으며, 두 사람은 미일관계의 강화와 국제평화를 위해 협력하고 양국의 안보동맹을 유지하자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고 합니다. 하토야마는 미국과 ‘건설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이루고 싶다고 했다는데, 미국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중요하다고 한 동아시아 국가들과도 그런 관계를 갖도록 노력하길 기대합니다.

오바마가 추구하는 정책의 핵심은 한마디로 ‘희망(Hope)’입니다. 모든 사람들, 특히 가장 열악한 상황에 놓인 사람조차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그 희망을 식량삼아 당당한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하토야마의 기치는 ‘우애(Fraternity)’입니다. 지난 주 하토야마가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일본의 새 항로(A New Path for Japan)’에 보면 ‘우애’의 뜻이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냉전 후 일본은 계속해서 미국이 주도한 세계화에 시달려왔다. 자본주의의 근본주의적 추구는 인간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취급한다. 결과적으로 인간은 존엄성을 잃게 된다. 어떻게 하면 윤리와 절제를 모르는 시장 근본주의와 금융자본주의를 종식시키고 우리 시민들의 가계 (finances)와 생계 (livelihoods)를 보호할 수 있을까? 지금 우리가 직면한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자유 속에 내재된 위험을 완화하기 위해 우애로 돌아가야 한다. 우애는 세계화된 자본주의의 과도한 부절제를 바로잡고 우리의 전통에서 자라난 지역적 경제생활을 수용하려 하는 원칙을 뜻한다.

“우리는 우애의 원칙 아래, 인간의 생명과 안전에 관계되는 분야, 즉 농업, 환경, 의약 분야의 정책을 실시할 때에 세계화의 요구를 따르지 않을 것이다. 정치인으로서 우리의 책임은 세계화의 과정에서 버려진 비경제적 가치들을 재조명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을 한데 묶고, 자연과 환경을 소중히 하고, 복지와 의료제도를 재건하고, 보다 나은 교육과 양육을 지원하며, 부(富)의 격차를 해소하는 정책들을 펴나가야 한다.”

하토야마는 동아시아공동체 창설 또한 우애의 개념에서 나온 것이라며, 동아시아에 위치한 일본은 이 지역의 경제협력과 안보를 위한 틀을 짜야만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중국 경제 규모가 ‘멀지 않은 장래에’ 일본을 능가하리라 예견하고, 세계의 지배력을 유지하려는 미국과 지배력을 차지하려는 중국 사이에서 정치경제적 독립을 유지하고 국익을 보호하는 건 일본뿐만 아니라 아시아 중소 국가들의 관심사라고 했습니다. 그는 ‘지나친 민족주의’를 극복하고 ‘규칙(rule)에 의거한 경제협력과 안보’를 추구해야 국제협력의 틀을 짤 수 있다고도 했습니다.

하토야마가 품고 있는 우애의 이상이 실제적 결과를 거둘 수 있을까를 두고 벌써부터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54년만의 선거혁명을 도운 오자와 이치로 민주당 대표대행을 따르는 파벌을 비롯한 다양한 이념의 그룹들과 한 팀으로서 해묵은 관료주의를 개혁하고 양극화 해소 등, 무수한 문제들을 해결해나갈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일본의 유력지 아사히신문이 월요일과 화요일에 실시한 전화설문조사에서 하토야마의 민주당이 정부를 개혁할 수 있을 거라고 대답한 응답자는 겨우 32퍼센트였고, 46퍼센트는 개혁하지 못할 거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즉 많은 유권자들이 민주당에 대한 신뢰보다는 자민당에 진저리가 나서 민주당을 선택했다는 겁니다. 조사에 응한 사람이 1,104명밖에 안 되어 1억2,800만 인구의 표본이 될 수 있는가는 차치하더라도, 하토야마에겐 나쁠 게 없는 결과입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큰 법인데 기대가 이렇게 낮으니까요.

하토야마가 오바마처럼 내 사람 남의 사람을 가리지 않고 탕탕평평한 인사를 하고, 일본 국민이 참을성과 희망을 갖고 기다려주면 꼭 성공하리라 생각합니다. 54년 동안 한 정당의 독주 또는 독재를 견뎌낸 일본인들, 230여년 만에 첫 흑인 대통령을 선출한 미국인들, 오래 기다려 이룬 혁명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여 이 시대를 성공한 혁명의 시대로 만들기를 바랍니다. 우리 정부의 탕평 불능 인사를 반면교사로 삼아도 좋으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