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칼럼

여자의 종류 (2009년 9월 24일)

divicom 2009. 12. 29. 19:20

지난 주말 이화여고 유관순기념관에서는 사단법인 ‘사랑의 친구들’ 기금 마련 바자회가 열렸습니다. 높고 푸른 하늘 아래 하얀 차양을 치고 열심히 호객하는 자원봉사자들 덕에 표고니 갓김치니, 몇 가지 사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123년이나 된 명문학교의 캠퍼스도 아름답고 푸른 하늘 흰 구름도 눈이 부셨지만 하나라도 더 팔려고 애쓰는 여성 봉사자들의 웃는 얼굴이 참 보기 좋았습니다.

쇼핑객들이 붐비는 거리에선 또 다른 여성들이 ‘여성신문’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반기문 총장 유엔 양성평등 시대 열다’라는 1면 톱기사의 제목 아래에 ‘임기 내 유엔 고위직 여성 40% 할당 천명’이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었습니다. 여성과 남성은 인류의 시작과 함께 공존해왔으나 양성평등은 아직도 세계적 과제로구나 생각하니 서글펐지만 기사를 읽다보니 위안이 되었습니다.

2006년 12월 취임하며 유엔에서 여성의 역할을 강화하겠다고 천명한 반 총장은 유엔 역사상 가장 많은 여성을 고위직에 임명한 사무총장입니다. 반 총장 취임 후 고위직 여성의 수가 40%나 증가했으니 말입니다. 위 기사의 소제목에 ‘40% 할당’이라고 쓰여 있는 건 ‘40% 증가’의 오역일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반 총장의 양성평등 노력 덕에 현재 유엔의 여성 사무차장은 9명에 이르고 유엔 출범이후 처음으로 여성이 유엔 사무국 법률부서의 장으로 임명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 반 총장이 여성신문의 톱을 장식하게 된 건, 지난 14일 유엔총회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된 결의안 때문입니다. 유엔 산하 여성기구들을 통폐합해 젠더 이슈를 전담하는 하나의 강력한 기구를 발족시키자는 결의안입니다. 아시다시피 젠더(gender)는 생물학적 성(性)을 나타내는 섹스(sex)와 비교되는 개념으로 사회학적 성을 뜻합니다. 192개국이 참가한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결의안에 따라 사무차장을 수장으로 한 새로운 여성기구가 내년 중반에 출범하게 됩니다.

사무차장은 사무총장, 부사무총장에 이어 유엔 내부 서열 3위의 직급입니다. 유엔 산하에는 여성개발기금(UNIFEM), 사무총장 여성특별보좌관실(OSAGI), 여성지위향상국(DAW), 국제여성연구훈련원(INSTRAW)이 있지만, 사무차장이 수장을 맡고 있는 국제연합아동기금(UNICEF)을 비롯한 다른 기구들에 비해 정치경제적 힘이 약하다고 합니다.

여성신문 박윤수 기자에 따르면 이번 결의안의 채택은 근 3년에 걸친 정치적 공방의 결실이라고 합니다. 유엔의 여성부문에 대한 개혁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전 세계 162개 여성단체들이 2007년 3월 8일 ‘세계여성의 날’에 유엔 사무총장에게 공개편지를 보냈고, 2008년 2월26일엔 16개의 비정부기구가 모여 유엔의 여성 통합기구 설치를 위한 ‘양성평등구조개혁(GEAR: Gender Equality Architecture Reform)’ 캠페인을 발족시켰다고 합니다. 이 캠페인 덕에 올 3월, 유엔 여성 관련 부서 및 산하기구를 통합해 새 기구를 만들어야 한다는 제안서가 유엔총회에 반 총장 이름으로 제출되었고 이번에 결의안으로 채택된 것입니다.

결의안이 채택되던 날 우리나라에서는 새 여성부 장관으로 지명된 백희영 서울대학교 교수에 대한 지명 철회 요구가 열흘 넘게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월요일엔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여성민우회 등 여성운동을 이끌고 있는 단체들이 백 교수의 장관 임명에 반대하는 의견서를 국회 여성위원회에 제출했고, 화요일엔 박영숙 미래포럼 상임대표 등 11명의 여성계 원로들도 반대 의견을 냈습니다. 여성정책과 현안에 대한 지식과 전문성 결여, 젠더 의식의 부족, 부동산 투기 등 도덕적 기준 미달 등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남자보다 여자가 여자에게 가혹하다고 말하기 좋아하는 남자들은 또 그렇게 얘기할지 모르지만, 한국은 아직 여성이 살기 힘든 나라이고 여성부는 아직 할 일이 많으니 그 일을 아는 사람이 장관을 맡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한국은 양성간의 임금 격차가 매우 심한 나라입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7월에 발표한 사회, 노동보고서를 보면 2008년 기준 회원국 평균 임금격차는 18.8%였으나 한국에서는 38%나 되었습니다. 한국의 남녀고용률 격차는 30%로 회원국들 가운데 4번째로 격차가 심했습니다.

국제 아동권리기관 ‘세이브 더 칠드런(Save the Children)’이 5월에 발표한 ‘2009 어머니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 158개국을 대상으로 한 ‘어머니로 살기 좋은 나라’ 조사에서 한국은 50위에 그쳤습니다. 여성으로 살기도 힘들고 어머니로 살기도 힘든 나라에서 여성이 결혼과 출산을 피하는 걸 나무랄 수는 없습니다. 2006년 소위 결혼 적령기 여성(25-29세)의 미혼율은 59.1%로 5년 전(40.1%)에 비해 거의 20% 포인트 증가했다고 합니다. 한국 여성 1명이 가임기간(15~49세)에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출생아 수는 평균 1.08명으로 회원국들 가운데 가장 적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왜 이 정부가 출범 초 여성부를 없애려고 했는지, 왜 여성문제에 문외한인 사람을 장관에 앉히려고 하는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여성부가 만들어진 건 겨우 2001년, 정부가 수립되고 60여년이 지난 후입니다. 2005년 6월에 여성가족부로 확대되었으나 2008년 2월 이명박 정부의 출범과 함께 여성부로 축소되었습니다. 여성부의 축소가 곧 여성 권리의 축소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면 장관을 고르는 일에서부터 성의를 보여야 합니다. 여성운동에 헌신하다 여성부의 수장을 맡았던 한명숙, 지은희, 장하진 씨와 같은 이를 찾아내야 합니다.

명문학교를 다니고 머리가 좋다 해서 어떤 일이든 잘 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하고 싶은 일, 잘 하는 일을 해야 자신의 삶도 의미 있는 것이 되고 주변에도 유익합니다. 지난 주말 ‘사랑의 친구들’ 바자에서 땀을 흘린 여성들처럼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봉사하는 데서 기쁨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아파트를 샀다 팔았다 하며 재산을 증식하는 데서 기쁨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자리의 적임자를 찾으려면 그이가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 어떤 일에서 기쁨을 느끼며 살아왔는지 보면 됩니다. 백 후보자를 굳이 여성부 장관에 임명할 필요가 없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