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칼럼

영란아, 미안해! (2009년 10월 30일)

divicom 2009. 12. 29. 19:25

요즘 자꾸 네 생각이 나. ‘성적은 땅값 순’이라는 기사를 보았을 때도, 현직 법관 중에 외국어고등학교 출신이 급증한다는 뉴스를 들었을 때도. 낙엽 떨어지는 송죽길에서 우연히 만났던 게 벌써 몇 해 전이지? 외국어고등학교와 과학고등학교에 진학한 쌍둥이 아들들의 안부를 물었더니 풀죽은 목소리로 대답했지? 괜히 보냈다고, 거기만 가면 외국어 전문가와 과학자가 될 줄 알았는데, 그냥 대학가는 공부만 한다고, 돈이 없어 아이들이 상위그룹 스터디그룹에 끼지 못한다고.

작년 초던가, 그 길에서 또 만난 게? 쌍둥이들은 대학에 다닌다고 했지? 하나는 군대에 가고 하나는 휴학 중이라고, 고민을 많이 하는데 도와줄 방법이 없다고 서늘하게 웃더니 서둘러 가던 길을 갔지. 성당에서 주관하는 아기 돌보는 곳에 자원봉사를 하러 간다고 했지.

영란아, 같은 교복을 입고 같은 시를 읽던 고등학교 땐 그래도 삶이 평등해보였어. 그때도 학교는 일류, 이류, 삼류로 나뉘고 돈 있는 소수는 과외를 했지만 학원은 재수생만 가는 곳이었고, 우린 그런대로 자유로웠어. 가끔은 은행잎이 폭신한 운동장에 앉아 수업시작 종소리마저 놓치곤 했지. 얼굴을 붉히며 교실 뒷문으로 들어서면 선생님이 “이 자식들!” 하며 눈을 부라리셨지만 무서운 엄포 속에 숨은 사랑을 아는지라 겁나지 않았어.

공부 잘하던 네가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대학에 가지 못할 때, 참 마음이 아팠지. 포기하지 말라고 너를 닦달했지만 그땐 몰랐어, 가난을 대물림 받을 땐 패배의식도 물려받기 쉽다는 걸. 네 아들들이 공부를 잘해 외고로 과고로 갈 땐 내 일처럼 기뻤지. 그 아이들이 너를 옭아매고 있던 무거운 사슬을 끊어주리라 생각했거든. 우연히 잠깐 만난 자리에서 네가 외고의 운영에 대해 불평할 때도 난 별로 동의하지 않았어. 자랑하고픈 아들을 둔 엄마의 엄살일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요즘 언론에 오르내리는 외고 얘기를 들으니 이제야 그때 네 맘을 알 것 같아. 영란아, 미안해.

마침 네가 사는 서대문구 출신 국회의원 정두언 씨가 지난주에 특수목적고인 외고를 특성화고로 바꾸자고 ‘초중등교육법 개정안’을 내놓았대. 교육과학기술부 일각에선 외고를 국제고로 전환한다고 하고,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은 일반고로 전환해야 한다고 하고, 청와대와 전국 시도교육감들은 외고를 그대로 두고 문제점만 개선해야 한다고 한대.

최근 새로 임용되는 판사들 중에 외고 출신들이 급격히 늘고 있대. 2000년 판사 임용자 중에 9.2퍼센트가 특목고와 강남 3구 출신이었는데 그 비율이 계속 높아져서 올해는 37퍼센트나 되었대. 현직 법관 중엔 대원외고 출신이 58명으로 제일 많고, 경기고와 광주일고가 각각 38명과 32명인데, 앞으론 격차가 더 심해질 거래. 외국어 전문가를 키워낸다는 특수 목적을 가지고 출발한 외고가 판사를 키우는 학교로 변질되었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아.

조선일보 기사를 보니 대원외고는 올해 유학반 94명 전원이 미국 명문대에 합격했대. 대원외고 신입생의 절반(49.8%)이 소위 강남 3구(강남·서초·송파) 출신이고, 강남3구를 뺀 서울지역이 30.4%, 지방은 19.8%이라니 ‘성적은 땅값 순’이라는 말이 맞긴 맞나봐. 대원외고 국제반 3학년생 99명 가운데 유학이나 연수 경험이 없는 학생은 15명뿐이라니 미국엘 갔다 와야 합격할 수 있다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닌가 봐. 그러니 유학도 연수도 못 보낸 아들이 외고에 다닐 때 네가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을까. 대원외고엔 최근 5년간 수능에서 언어, 수리, 외국어 등 3개 영역에서 모두 1등급을 받은 학생이 887명이나 되었대. 그런 학생을 한 명도 배출하지 못한 학교가 1,357개교나 되었다니 엄청난 차이지.

엊그제 서울에서 일반고 교사로 평생을 보내고 있는 친구를 만났어. 우수한 아이들이 외고, 과고, 자립형 사립고, 비평준화 지역 고교로 빠져나간 학교에서, ‘2x+3x=5x’도 이해 못하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 괴롭다고 했어. 그나마 성적이 좋은 아이들은 거의 다 경쟁에서 이기는데 혈안이 된 이기적인 아이들이라고 하더군. 그 친군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과 못 하는 아이들을 한데 모아 가르쳐야 교육이라고 했어. 못하는 아이들은 잘하는 아이들에게서 자극을 받고, 잘하는 아이들은 못하는 아이들을 보며 세상엔 자기보다 머리나 운이 나쁜 사람도 있다는 걸 알게 되고 어울려 사는 법을 배운다는 거야.

미국 명문대학을 가는 것도 좋고 판사가 되는 것도 좋지만, 가장 중요한 건 어떤 인간이 되는가이겠지. 학력 높고 경제력 있는 부모에게서 태어나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유학이나 연수를 다녀오고, 외고에 진학해서 수월성을 북돋는 교육을 받고 명문대학을 나와 판사가 된 사람이, 젖은 땅은 한 번도 밟아보지 못한 사람이, 자신의 삶과 전혀 다른 삶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을까? 사회의 부조리를 피부로 느끼고 그걸 개선하기 위해 진력할 수 있을까?

머리는 있어도 가슴은 없는 법조인들이 양산될지도 몰라. 8세 어린이를 잔인하게 성폭행하고 평생을 장애인으로 살게 한 범죄자에게 12년 형을 내리고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하는 법관과 검사 같은 사람들, 용산 철거민 참사에서 아버지를 잃은 사람에게 오히려 책임을 물어 6년형을 선고한 판사 같은 법조인들이 자꾸 많아질지 몰라. 국제적인 경쟁력을 키워 나라와 사회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데 기여하라고 만든 특수목적고가 이기적 삶의 향유를 위한 발판이 된다면, 과연 그런 학교가 존재해야 할까?

난 외고는 폐지해야 한다고 생각해. 1992년 외국어고등학교들이 첫 신입생을 뽑을 때 가졌던 특수 목적 -외국어 실력으로 무장한 글로벌 시대의 주역 배출-이 사라졌기 때문이야.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엔 외국어에 노출된 학생이 많지 않았어.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전혀 달라. 유치원과 초등학교부터 영어를 배우니 외국어를 잘하는 학생을 키우기 위해 따로 전문고교를 운영할 필요가 없어.

꼭 어학 전문고교를 운영해야 한다면 영어 빼고 소수의 학생만을 대상으로 제2외국어 전문학교를 만들거나, 국어 혹은 한국학 전문고교를 만드는 게 좋다고 생각해. 요즘 우리말과 글을 제대로 구사하고, 나라의 역사와 전통을 아는 학생들이 갈수록 줄고 있으니 말이야. 세계화도 좋지만 제 나라가 없으면 세계화할 나라 자체가 없는 것이니 제 나라와 나랏말을 지키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

영란아, 쌍둥이들은 어떻게 지내니? 혹시 벌써 판사가 된 건 아니니? 네 아들 같은 사람이 판사가 되면 정말 좋을 텐데. 넌 요즘도 아기들을 돌보고 있니? 늘 그랬듯이 어려운 상황에서 더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려 애쓰고 있을 것 같아. 나가봐야겠어. 황혼녘 송죽길에서 아기 돌보고 돌아오는 너를 만나고 싶어. 또 한 번 우연히 만나 단풍든 홍옥 한 봉지 사주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