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노년일기 38: 이별은 어려워라 (2020년 7월 4일)

divicom 2020. 7. 4. 08:22

 

마침내 2G폰과 이별했습니다.

오래된 관계가 끝날 때에는 아프기 마련입니다.

어젠 하루 꼬박 누워서 지냈습니다.

 

휴대전화를 쓰기 시작한 건 2000년 어느 날입니다.

그때는 그게 2G폰인 줄도 몰랐습니다.

그때도 지금처럼 휴대전화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는데

회사에서 회사 업무에 필요하니 소지하라고 강권하다시피

했습니다. 당시 저는 미국대사관 문화과 전문위원으로

재직하고 있었고, 휴대전화가 싫어 일을 그만둘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이 20년 동안 계속됐습니다.

 

휴대전화가 ‘진화’되며 3G폰, LTE, 5G폰 등으로

바꾸라는 회유와 종용이 이어졌지만 바꾸지 않았습니다.

전에도 이 블로그에 쓴 적이 있지만, 새로 나오는 전화기들이

너무 크고 비싼데다가 성능도 너무 많아 싫었습니다.

 

제게 전화는 다른 사람들과 연락 —요즘엔 ‘소통’이라 하는 — 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고, ‘연락’은 필요할 때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위 스마트폰이라는 전화는 24시간 소지자의 삶을

지배하며, 그를 침묵할 줄 모르는 인간, 즉 사유할 줄 모르는 인간으로

만듭니다. 스마트폰 의존도가 높을수록 스마트하지 않거나 어리석고

시끄러운 인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011로 시작하는 번호의 2G폰을 오래 쓰니 좋았습니다.

전화기가 작고 가벼워 좋고 옛 번호를 그대로 쓰니 오래된 친구들이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이 ‘파시즘의 나라’에서 제 개인적 취향은 묵살됐습니다.

SK텔레콤은 2G폰 서비스를 종료할 테니 더 ‘진화’된 폰으로

바꾸라고 수없이 문자와 전화로 괴롭혔고, 요즘엔 하루 열 번 이상

전화기가 죽어 다시 살려야 했습니다.

전화기가 죽어 있는 시간에 누군가 문자를 보내거나 전화를 하면

기록도 남지 않을 테니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침내 엊그제 SK신촌지점에서 2G폰과 영영 헤어졌습니다.

SK측에서 무료로 기기를 준다고 했지만, 2G폰과 흡사한 모양의

중고 3G폰 기기를 가지고 가서 개통했습니다. 참을성 있게

일을 맡아 해준 김슬기 매니저 덕에 SK에 대한 분노를 조금이나마

누그러뜨릴 수 있었습니다. 그는 SK에서 무료로 새 기기를 주니

그걸 쓰라고 했지만 그건 스마트폰 비슷한 거라 싫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개통을 하고 와서 사용하다가 결정적 문제를 발견했습니다.

주고받은 문자가 받은메일함에 남지 않는 것입니다.

중고 기기의 문제인 것 같은데 기기를 판 사람에게 연락하니

자기도 이유를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하는 수 없이 두어 시간 전에 다녀온 SK지점으로 돌아갔습니다.

안내 직원이 김슬기 매니저에겐 다른 손님이 있다며

김연희 매니저에게로 안내했습니다.

 

서류 작업했던 것을 취소하고 다시 하는 데는 긴 시간이 걸렸습니다.

작업이 끝날 째쯤엔 기진맥진하여 아무래도 좋다는 자포자기 상태가

되었습니다. SK에서 무료로 주는 3G폰을 받기로 했는데, 제가 선택한

검정폰이 현장에 없어서 퀵서비스로 받아도 한 시간쯤 걸린다고 했습니다.

저는 가능한 한 퀵서비스를 쓰지 않습니다. 오래전 문서를 가져오기로

한 퀵서비스가 약속 시간이 훨씬 지나도 오지 않았습니다.

그 퀵서비스 기사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나중에야 듣고

얼마나 미안했는지 모릅니다.

 

현장에 있는 오렌지색 전화기를 받아 개통하고 돌아올 때는 심신이 지쳐

입도 열기 힘들었습니다. 2G폰과는 결별했지만 011은 간신히 지켰는데

011과도 일 년쯤 후엔 억지 이별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왜 011을 쓰면 안 되는 건지, 왜 모든 국민이 010 전화번호로

억지 통일되어야 하는지...

 

저는 특정 종교의 신자는 아니지만 늘 기도합니다.

‘기도’는 마음을 다해 천지신명과 우주의 힘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대개는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지만 부득이한 경우에는

누군가의 눈에 나쁜 결과가 일어나라고 기도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지난 번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어떤 후보의 낙선을 위해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낙선했습니다.

 

이제부터 저는 SK텔레콤이 2G폰 서비스를 종료한 것을 후회하게

만들기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천지신명이여, 도와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