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노년 일기 27: '조산'의 계절(2020년 2월 22일)

divicom 2020. 2. 22. 16:15

본래 2월은 무채색의 계절이었습니다.


꽃은 귀하고 잎마저 드물어 속살을 드러낸 산들부터

푸른 빛이라고는 없는 돌무더기 사이를 흐르는 개울물,

언제든 눈을 쏟을 것 같은 회색 빛깔 하늘,

여린 햇빛이나마 받아들여 몸을 데우려는 사람들의 검은 의복까지

세상은 흰색과 검은 색 사이 초라했습니다.


그런데 화석연료로 지구를 덥힌 사람들로 인해,

계절과 상관없이 아무 때나 먹고 싶은 것을 먹으려는 욕망으로 인해,

2월은 4월과 5월을 닮아갑니다.

과일가게는 딸기, 참외, 수박, 원색으로 화려하고

채소전엔 노란 파프리카부터 연두 애호박까지 색색의 식물이 넘쳐납니다.


비닐하우스에서 태어난 조산 생물들이 2월에 색칠을 하는 동안

우리집 군자란도 벌써 피었습니다. 자꾸 봉오리를 맺길래

"아니, 아직 아니야. 천천히 나와!" 여러 번 다독였건만

기어이 꽃을 피우고 말았습니다


2월의 군자란은 4월 군자란보다 대도 가늘고 꽃도 조그맣습니다.

조산된 아기들은 인큐베이터에서 보살펴 잘 성장하도록 도울 수 있지만

제 철이 오기 전에 피어난 군자란은 어떻게 도와야 하나,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때를 맞추지 못하는 건 군자란만이 아닙니다.

노란 유치원 버스를 기다리는 아이들은 말투부터 몸짓까지 작은 어른들입니다.

대낮에 곱창집 의자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곱창을 먹는 중고생들은

저보다 더 세상살이에 능숙해 보입니다.


바야흐로 세상은 '너무 일찍' 태어나거나 여물어버린 동식물로 가득합니다.

'조산'의 속도는 계속 빨라지지만 그 속도를 따라갈 의욕도 능력도 없습니다.

'그렇게 빨리 가서 어디로 가는데요?' 하는 질문만이 떠오릅니다. 


빠른 속도에 맞추기는커녕 제 속도나 맞추면 좋겠습니다.

머리가 하얀만큼 아는 것도 많았으면 좋겠지만

그건 알래스카처럼 먼 목표입니다.


'조산의 계절'에 '만산産'조차 꿈꾸기 어려운 저는 

매일 '지혜와 용기'를 실천하는 인간이 되고자 기도할 뿐입니다.

태어날 때보다는 나은 인간이 되어 죽고 싶은데

그것이 과연 가능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