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2964

솔 벨로의 문장들1: 오늘을 잡아라 (2023년 12월 13일)

서머싯 몸의 에 이어 산책길 동행이 된 책은 솔 벨로 (Saul Bellow: 1915-2005)의 입니다. 이 책에는 표제작인 를 비롯해 네 편의 단편소설과 한 편의 희곡이 실려 있습니다. 산책길 동행이 될 만한 책들 중 이 책이 제일 크고 무거워 망설였지만, 이 단편소설의 첫 문장 때문에 이 책을 선택했습니다. P. 7 "When it came to concealing his troubles, Tommy Wilhelm was not less capable than the next fellow. 토미 윌헬름은 골치아픈 상황을 숨기는 데 있어서는 누구 못지 않았다." 이 문장이 예고하는 대로, 그리고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토미는 악재가 겹친 상황에서 헤어나오지 못합니다. 그에겐 상황의 호전을 ..

오늘의 문장 2023.12.13

노년일기 198: 나이 든 친구들 (2023년 12월 10일)

지난 열흘 동안 세 그룹의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저처럼 비사교적인 사람이 이럴 때 사교적인 사람들의 연말은 얼마나 바쁠까요? 한 그룹은 아이가 중학교 1학년 때 아이 반의 어머니 모임에서 만난 사람들입니다. 아이들이 마흔이 넘었으니 우리 중 가장 어린 사람도 세는 나이로 일흔이 되었습니다. 직장을 다니던 사람들이 은퇴하여, 이제 이 모임은 손자손녀를 키우며 할머니 노릇을 하는 사람들과 손주 없이 할머니가 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들의 대화는 아이들 얘기, 저세상으로 갔거나 이 세상에 있는 남편 얘기부터 대법원장 후보와 대통령 얘기까지 온갖 주제를 넘나듭니다. 또 한 그룹은 옛 직장의 친구들과 그들 덕에 알게 된 친구 모임이었습니다. 최근에 아들을 잃은 친구를 위로하다 각자가 겪은 상실에 대해 얘..

동행 2023.12.10

김종건 교수님... (2023년 12월 4일)

교수님, 마침내 제임스 조이스를 만나게 되셨군요. 조이스가 교수님께 고개 숙여 감사를 표하면 교수님은 부끄러운 듯 웃으시겠지요. 세계의 국가들을 구분하는 다양한 기준 중에는 조이스의 와 를 제 나라 말로 번역한 번역서를 가지고 있는가 아닌가 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이 나라는 교수님 덕택에 번역본을 가진 소수의 국가 중 하나가 되었고, 번역본을 가진 네 번째 나라가 되었습니다. 1988년 11월 교수님은 소설 번역본 세 권과 주해서 한 권으로 구성된 완역본을 출간하셨고, 저는 12월 말 어느 날 고려대학교의 교수님 연구실로 찾아가 인터뷰를 했습니다. 교수님의 방은 조이스와 더블린 지도를 비롯한 자료로 가득했습니다. 철없던 저는 교수님을 깊이 존경하면서도 교수님을 놀렸습니다. 머리가 하얗게 세도록 조이스가 ..

동행 2023.12.04

서머싯 몸의 문장들5: 이방인 (2023년 12월 1일)

오늘은 룸메이트의 생일입니다. 제가 대학 시절 마지막 미팅에서 만난 두 사람 중 한 명을 선택해 파트너가 되었는데, 그가 지금의 룸메입니다. 인생은 'B-C-D'라는 말이 다시 떠오릅니다. 'Birth(태어남)-Choice(선택)-Death(죽음)'. 수십 년 전 룸메를 선택하여 함께 죽음을 향해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 선택이 좋은 선택인지 나쁜 선택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건 그가 이 사회의 방식에 잘 맞는 사람이 아니라는 겁니다. 저는 태어난 이후 줄곧 한국에 살았으나 이곳은 늘 이방처럼 느껴지는데, 그 또한 저와 비슷한 구석이 많습니다. 우리는 때로 이민자들처럼 이 사회를 낯설어 하며 서로를 위로하고 부축합니다. 서머싯 몸의 에서 아래 문단이 눈길을 끈 이유입니다. P. 18..

오늘의 문장 2023.12.01

What Numbers Say (2023년 11월 29일)

가끔 인터넷에서 예전에 쓴 글을 만납니다. '숫자가 말하는 것'이라는 제목의 이 글은 코리아타임스에 9년쯤 연재했던 제 칼럼 'Random Walk'에 2009년 3월에 쓴 글인데, 엊그제 우연히 만났습니다. 'Random Walk' 칼럼에 쓴 100번째 칼럼... 반가워서 아래에 옮겨둡니다. 인터넷 판에 3월 13일로 되어 있으니 종이 신문에는 14일에 실렸겠지요. 어머니가 우리 나이로 여든 살이 되셨을 때 쓴 글입니다. 그땐 여든이 참 많은 나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아흔넷의 어머니를 보면 여든은 참 젊은 나이입니다. 2009년 3월, 지난 5년 동안 쓴 칼럼을 돌아보며 느꼈던 슬픔이 다시 살아납니다. 시간은 그때나 지금이나 소중한 사람들을 앗아갑니다. 그리고 우리의 가슴엔 자꾸 무덤이 쌓여갑니다. ..

<달과 6펜스>와 폴 고갱 (2023년 11월 28일)

서머싯 몸의 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 한참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어떤 책을 읽기 시작하는 건 낯선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것과 같습니다. 처음부터 쉽게 읽을 수 있는 책, 쉽게 이해되는 문장들이 있는가 하면, 잡힐 듯 잡히지 앉는 문장들도 있습니다. 는 쉬우면서도 어려운 책이었습니댜. 대학 시절에 읽고 다시 읽는데 처음 보는 책 같았습니다. 이 책은 서머싯 몸이 폴 고갱(Paul Gauguin)의 삶에서 영감을 받아 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주식중개인이었던 주인공이 그림에 전념하겠다고 인생 항로를 바꾸고 타히티 등 남태평양의 섬에서 살다 죽는 것도 고갱을 닮았습니다. 를 읽고 난 후 영문 위키피디아 (https://en.wikipedia.org/wiki/Paul_Gauguin)에서 폴 고갱을 찾..

오늘의 문장 2023.11.28

서머싯 몸의 문장들4: 운명 (2023년 11월 26일)

과학은 발달했지만 인류가 아직 답하지 못하는 오래된 질문들이 수두룩합니다. 그중 하나는 운명은 타고 나는 것인가, 만들어 가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젊어서는 '정해진 운명 같은 것은 없다, 내 인생은 내가 만들어 가겠다!' 하던 사람들이 나이 들어가며 '운명이란 게 있는 것 같아, 아무리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는 게' 라고 하는 걸 가끔 봅니다. 피하고 싶은 운명이 있다면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요? 서머싯 몸은 에서 '눈에 띄지 않게 살라'고 합니다. P. 129 We must go though life so inconspicuously that Fate does not notice us. And let us seek the love of simple, ignorant people. Their ign..

오늘의 문장 2023.11.26

서머싯 몸의 문장들3: 예술과 예술가 (2023년 11월 24일)

대학교 2학년 때 난생 처음으로 써 본 단편소설이 학보사에서 주최하는 문학상에 당선된 적이 있습니다. 친구들은 축하해 주었지만 저는 늘 죽음을 고민하던 터라 기쁜 줄도 몰랐습니다. 가뜩이나 우울한 저를 더 우울하게 만든 건 지금은 고인이 되신 외삼촌이었습니다. 학보에 게재된 제 소설을 보고 "글이 너무 위티해서 잘못하면 박완서 같이 되겠다"고 하셨으니까요. 박완서 선생은 연세 드실수록 좋은 작품을 많이 쓰셔서 한국 문학에 이정표를 세우셨지만, 초기엔 그분의 작품에 대한 평가가 다양했고 외삼촌은 그분을 좋아하지 않았던가 봅니다. 훗날 그분의 팬이 된 저도 그때는 그분의 작품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삼촌의 말에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문학작품을 읽고 쓸수록 작가에게 위트가 얼마나 중요한 덕목..

오늘의 문장 2023.11.24

서머싯 몸의 문장들2: 사람들 (2023년 11월 22일)

주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존재들 중에 사람처럼 재미있는 존재도 없을 겁니다. 물론 우리 자신도 포함됩니다. 생김새도 종류도 다양하지만, 무엇보다 사람을 재미있는 존재로 만드는 것은 그 사람을 그 사람이게 하는 점들--장점이든 약점이든--과 그 사람이 보여주거나 숨기는 모순들인 것 같습니다. 서머싯 몸의 에는 바로 이런 점에 관한 작가의 관찰과 통찰이 보입니다. P. 24 He was probably a worthy member of society, a good husband and father, an honest broker; but there was no reason to waste one's time over him. 그는 훌륭한 사회 구성원이고, 좋은 남편이고 좋은 아버지이며, 정직한 증권맨이..

오늘의 문장 2023.11.22

부여와 부여 밤 (2023년 11월 20일)

오래전 한 번 가 본 부여는 늘 다시 가보고 싶은 곳이었습니다. 작년에 홈마트에서 서부여농협이 생산한 밤을 만났을 때 반가운 마음으로 사 들고 온 것도 그래서였습니다. 부여를 가 보지 못한 한 해가 끝나가는 어제 다시 홈마트에서 부여에서 온 밤을 샀습니다. 1킬로그램에 8,9 천원 하던 걸 6,900원에 세일 판매한다니 반갑고 고마웠습니다. 그물망에 든 밤들은 '부여왕밤(특)'이라는 광고와는 어울리지 않는 모양새였지만, 어쨌든 부여에서 온 것이니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무게가 이상했습니다. 주부 경력이 꽤 길다 보니 웬만한 무게는 맞추는데, 그물망의 밤 무게가 1킬로가 안 된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재미 삼아 부엌의 꼬마 저울에 올려 놓으니 바늘이 850그램과 860그램 사이에 머물렀습니다. 정량..

동행 2023.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