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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향 (2024년 2월 10일)

병실을 가득 채운 공기는 다른 어느 곳의 공기와도 다릅니다. 고통의 냄새라고 하기엔 너무 뭉근하고 오래 전 할머니 내음이라고 하기엔 너무 현대적이고... 낯익고도 낯선 그 공기 속에서 몇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면 알 수 없는 피로가 업습합니다. 그대로 누워 버리고 싶은 마음을 떨치려면 베란다로 나가야 합니다. 나가는 순간, 종일 운동화에 갇혀 뜨거워진 발과 무거운 다리부터 축 처진 어깨, 자꾸 아래로 향하는 눈꺼풀까지 봄비 맞고 일어서는 풀처럼 삽상하게 살아납니다. 초라한 플라스틱 화분에서 앙상하게 자란 천리향의 향기 덕입니다. 베란다를 채우고 있던 서늘하고 오묘한 향기가 눈물이 핑 돌게 반갑습니다. 보아 주는 이 드문 겨울 베란다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홀로 노력하여 향기 세상을 만든 걸까요? 천리향 같은 ..

나의 이야기 2024.02.10

노년일기 211: 그 방이 자꾸 가라앉는 이유 (2024년 2월 7일)

1415호는 가라앉고 있습니다. 한 침대 주인의 84년 한 침대 주인의 94년 한 침대 주인의 58년 한 침대 주인의 87년 리베로 간병인의 77년 작은 방에 400년이 실려 있습니다. 꼬마 문병객 둘이 바쁜 경비원 뒤로 숨어듭니다. 꼬마들은 애드벌룬이 되어 1415호를 밀어올립니다. 침대의 주인들과 간병인의 웃음이 날개를 단 듯 솟구칩니다. 꼬마들이 떠난 1415호는 길고 무거운 침묵입니다. 꼬마들 뒤에 놓인 짧은 시간과 꼬마들 앞에 놓인 긴 시간이 거주자들의 뒤에 놓인 긴 시간과 앞에 놓인 짧은 시간과 오버랩되어 낡은 몸들이 뒤척입니다. 이윽고 코 고는 소리가 들립니다. 거주자들 모두 기억해 낸 것이지요. 결국 세계의 배들은 모두 침몰하거나 해체된다는 걸.

동행 2024.02.07

노년일기 210: 이웃 사람, 이웃 선생 (2024년 2월 5일)

다른 나라에서도 그런지는 모르지만 2024년 한국에서는 '이웃'이 매우 중요합니다. 아파트에 사는 사람이 층간소음 문제로 다투던 이웃의 손에 죽었다는 뉴스가 낯설지 않습니다. 카페에서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서둘러 카페를 벗어날 때도 있습니다. '이웃 복'이 필요한 곳이 또 하나 있음을 어머니 덕에 알았습니다. 바로 병실입니다. 몇 년 전 2인실에 입원한 환자를 돌보느라 병실에서 며칠 동안 지낸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 있던 이웃 환자는 가끔 신음소리를 낼 뿐이었는데, 뒤이어 들어온 이웃은 특정종교와 관련된 말과 노래를 크게 틀어놓아 잠을 잘 수도 없고 쉴 수도 없었습니다. 직접 얘기했다가 싸움이 될까봐 간호사실에 얘기하자 간호사실에서 병실 규칙을 들어 중단시켰습니다. 어머니 병상 바로..

동행 2024.02.05

파리 대왕 (2024년 2월 3일)

어머니의 병실에 드나들며 다시 한 번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합니다. 병실이나 대합실처럼 제한된 곳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매우 적어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은 대개 토막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 많습니다. 어머니가 주무시는 시간에 잠깐씩 보았지만 그새 손바닥만한 책 두 권을 다 읽었는데 그 중 한 권은 입니다. 언젠가 이라는 표현을 처음 접했을 땐 '파리'가 프랑스 파리인 줄 알았습니다. 나중에 의 '파리'가 사람들이 싫어하는 곤충 파리라는 걸 알고 적잖이 부끄러웠습니다. 이 작품은 노벨문학상을 받은 영국의 작가 윌리엄 골딩(William Golding: 1911-1993)이 1954년에 발표한 첫 소설로, 전쟁 대피 중에 고립된 섬에 추락한 비행기에 함께 탔던 소년들이 섬에서 자기들끼리 사회를 이루..

동행 2024.02.03

한국의 '호빗들' (2024년 1월 31일)

'호빗(Hobbits)'은 '반지의 제왕'으로 유명한 영국 작가 톨킨(J.R.R. Tolkien)의 소설에 등장하는 작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 키의 절반쯤 되는 키에 맨발로 다니는데, 인류 종족 중 하나이거나 인류의 가까운 친척으로 묘사됩니다. '반지의 제왕 (The Lord of the Rings)' 속 호빗들은 단순 소박한 삶을 영위하지만, 그들의 세상인 '가운데 땅: 중간계 (The Middle Earth)'가 위험에 처할 때는 온 힘을 다해 싸웁니다. 그 호빗들이 지금 한국에도 있습니다. 아늑한 지하굴에 사는 톨킨의 호빗들과 달리 한국의 호빗들은 병실 한쪽 구석에 놓인 침대를 집 삼아 방삼아 생활합니다. 그들은 톨킨의 호빗들처럼 눈에 띄는 차림으로 병실을 오가는 간병인 아주머니들입니다..

동행 2024.01.31

동신병원 '은탁 선생' (2024년 1월 28일)

룸메이트는 TV드라마를 좋아하지 않지만 SBS에서 시즌3까지 방영했던 '낭만닥터 김사부'의 열렬한 팬입니다. 그가 그 드라마에 빠져든 건 그 드라마가 얘기하는 것이 자신의 인생관에 부합하기 때문일 겁니다. 일터에선 무엇보다 실력이 있어야 하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이 실력을 발휘해야 하고, 그 바탕엔 인간, 특히 약자에 대한 애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어머니가 20일 넘게 누워 계신 동신병원은 '남만닥터 김사부'가 일하는 '돌담병원'과 많이 다를 겁니다. 돌담은 드라마 속에 있고, 동신은 서대문구에 있으니까요. 그런데 어제 동신병원에서 돌담병원 '은탁 선생'처럼 멋진 간호사를 발견했습니다. 제 시력이 워낙 나빠 그의 명찰에 적힌 이름을 보진 못했지만 그는 틀림없는 '은탁 선생'입니다. 가끔 마..

동행 2024.01.28

노년일기 209: 낡은 것은 몸뿐 (2024년 1월 25일)

병원 침상에 누우신 어머니의 몸을 만지다 보면 이 몸이 우리 어머니 것인가 낯설기만 합니다. 탄탄하시던 근육이 한두 달 만에 어디론가 사라지고, 매끄럽던 피부는 막대기를 덮은 낡은 옷 같으니까요. 그러나 시선을 통해 모습을 드러내는 어머니의 영혼은 여전히 낯익은 사랑입니다. 나이 들면 누구나 몸이 낡고 피부엔 주름이 생기지만, 그 몸에 깃든 영혼은 낡음과 주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일까요? 아일랜드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William Butler Yeats:1865-1939)도 그렇게 느꼈던가 봅니다. An aged man is but a paltry thing, A tattered coat upon a stick, unless Soul clap its hands and sing,..

동행 2024.01.25

노년일기 208: 잠시 숨어 있는 순간 (2024년 1월 22일)

어머니가 입원하신 지 17일째... 병원에 드나들다 보면, 특히 연세가 많아 회복의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이는 분들 사이에 있다 보면 자연히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다가 죽고 싶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혼자 죽는 것만은 피하고 싶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어떻든 상관없다고 합니다. 죽음은 아픔처럼 혼자 겪는 일이지만 사람들은 누구나 죽음의 순간도 살던 방식대로 맞으려 하는가 봅니다. 부디 각자가 원하는 죽음을 맞기를, 아니 그 죽음을 맞을 때까지 최선을 다해 생生을 살아내기를 바랍니다. 안락사를 다른 어느 나라보다 개방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네덜란드의 의사 베르테 케이제르는 수많은 환자들의 죽음을 목격하고 쓴 책 에서, 밤 사이에 홀로 죽은 반 리에트 씨에 대해 얘기합니다. 케이제르..

동행 2024.01.22

빙판 (2024년 1월 19일)

며칠 전 어머니 계신 병원에서 오빠 내외를 만났습니다. 오빠가 넘어져 오른손 뼈에 금이 갔다고 했습니다. 젊은 시절 네다섯 번이나 깁스를 했던 제겐 못 미치지만 오빠의 깁스가 처음은 아닙니다. 블로그를 찾아주신 분 덕에 다시 만난 2012년 12월 16일 자 ‘빙판’이라는 제목의 글에도 오빠가 오른팔에 깁스를 했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그때 그 글.. 거울 보듯 보고 나서 조금 줄여 옮겨 둡니다. 그 글의 전문을 읽고 싶으신 분은 링크를 클릭하십시오. https://futureishere.tistory.com/953 ----------------------------------------- '빙판' 하면 누구나 추운 겨울을 생각하지만 삶의 골목 골목엔 빙판처럼 우리를 시험하는 곳들이 늘 있습니다. 때로는 ..

동행 2024.01.19

노년일기 207: 강물이 흘러가는 곳 (2024년 1월 17일)

가끔은 강물이 흘러가는 것을 망연히 바라보곤 했는데, 근래엔 한참 그러지 못했습니다. 강물을 바라보는 건 생生을 바라보는 것인데... 그러다 헌책방에서 산 작은 책을 읽었습니다. 팀 보울러(Tim Bowler)의 . 표지에 강이 있어 이 책을 집어든 건지 모릅니다. River Boy는 뭐라고 번역해야 할까요? '강물 소년'이 될 수도 있고 '강의 소년'이 될 수도 있겠지요. 이 소설의 '강'은 인생을 은유한다고 합니다. 소설의 첫 장이 시작하기 직전 페이지에 구약성경의 전도서에 나오는 구절이 있습니다. Ecclesiastes 1:7 All the rivers run into the sea; yet the sea is not full; unto the place from whence the rivers c..

동행 2024.0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