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 12

노년일기 204: 인생을 다시 산다면 (2023년 12월 31일)

2023년의 마지막 날. 다 잤다는 기분이 들어 시계를 보니 새벽 네 시. 어젯밤 11시 반쯤 잠자리에 들었으니 좀 더 자야할 거야 생각하며 누워 있었지만 떠난 잠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상승은 드물고 낙하는 풍성했던 일년. 중력이 있는 지구에선 떨어지는 게 당연하겠지만 한 번쯤은 중력을 이기고 싶었는데 ... 그래도 사랑 많은 한 해였습니다. 아는 사람들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늘 기도하며, 지혜와 용기가 그들과 함께하기를 빌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친구들은 선물과 다정한 말로 격려해 주고,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친절로 위로해 주었습니다. 다시 새 달력을 걸며 자문합니다. 지나간 일년을 다시 산다면, 아니 지나간 인생을 다시 산다면, 다르게 살까... 어린 시절 아버지의 책상에 앉아 책을 읽던 시..

나의 이야기 2023.12.31

노년일기 203: 생애가 끝나갈 때 (2023년 12월 29일)

아침 기도 시간에도 낮에 산책을 하다가도 눈시울이 젖습니다. 생애의 끝 언저리에서 한 해의 끝을 맞는 분들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물 찬 제비 같던 어머니가 갑자기 거동을 못하게 되시고, 얼마 전만 해도 새로 나가는 데이케어센터가 재미있다고 밝게 웃으시던 이모가 요양병원으로 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선균 씨처럼 떠나지 않는 한, 우리 모두는 태어나서 1세기 안팎의 시간을 산 뒤에 삶이 죽음으로 치환되는 시간을 거쳐 마침내 죽음과 만납니다. 의지가 아무리 강해도 육체에서 시작된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미 죽음의 과정이 시작된 후에 당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그 과정을 대비하고 준비하는 건 삶이 한창일 때만 할 수 있으니, 이 또한 인생의 아이러니이겠지요. 삶이 한창일 때부터 감사..

동행 2023.12.29

노년일기 202: 우리는 살아있다 (2023년 12월 26일)

2023년의 마지막 달이 바쁘게 지나갑니다. 수많은 실패를 묻느라 마음이 바쁘지만 지나가는 해의 실패는 새해의 거름이 되겠지요. 몇 달 후면 94세가 되실 어머니는 자꾸 침묵에 빠져드시니, 앞서 가신 아버지와의 해후가 멀지 않은가 봅니다. 뵌 지 한참된 선배님이 소식을 주시고 만난 지 오랜 후배들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옵니다. 수양딸들은 가족들을 돌보느라 바쁘면서도 안부를 묻고, 아들은 악조건과 싸우면서도 늙은 부모를 챙깁니다. 가난은 부끄럽지 않지만 선물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선물하지 못하니 자괴감이 드는데 친구들이 말해 줍니다. '네가 있어 감사해'라고. 올해도 참 많은 사람들이 동행을 그쳤지만 우리는 아직 살아있습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있나 봅니다. 아직 갚아야 할 사랑이 많은가 봅니다.

나의 이야기 2023.12.26

노년일기 201: 역설적 십계명 (2023년 12월 24일)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입니다. 크리스천이든 아니든 오늘이 오면 예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언젠가 이현주 목사님이 쓰신 작은 책 을 읽다가 예수님 손바닥에 못이 박히는 부분에서 정말 손바닥이 견딜 수 없이 아픈 경험을 했습니다. 가끔...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아니... 그분이 이 세상에 머무시는 동안 얼마나 힘드셨을까를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분을 흉내 내며 살았으면, 적어도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성경을 읽어본 사람들, 그분의 이름을 들어본 사람들은 그분을 흉내 내며 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합니다. 오늘도 그런 생각을 하다가 존경하는 선배님께서 보내주신 이메일을 받았습니다. 선배님은 켄트 키스(Kent M. Keith)의 저서 를 읽으시고 그 내용을 요약해 보내셨는데, 그 핵심은 '지도자를 ..

오늘의 문장 2023.12.24

노년일기 200: 내 인생의 칭찬거리 (2023년 12월 22일)

책 많이 읽는 동생이 읽어보라고 빌려준 책 중에 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원제는 , 저자는 마리아 포포바 (Maria Popova)입니다. 포포바는 11명의 '앞서 나간 자들'의 삶을 통해 '아름다운 삶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무지무지하게 많은 책을 읽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터득한 지식에 사유를 곁들여 태피스트리와 같은 글을 자아낸 것이지요. 제게 사람은 풍경과 같은데 이 책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게다가 그 사람들은 대개 역사를 만든 이들입니다. 그러니 몇 쪽만 읽어도 노벨상 수상자들의 강연장에 앉아 있는 것처럼 머리에 과부하가 걸립니다. 이 책을 다 읽을 수는 없겠지만 벌써 위로를 받았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미국 최초의 여성 천문학자 마리아 미첼 (Maria Mitch..

나의 이야기 2023.12.22

노년일기 199: 은서 어머니께 (2023년 12월 20일)

은서 어머니, 오늘도 그 베이커리 카페에 오시겠지요? 당신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픕니다. 당신의 예쁜 얼굴은 언제나 곧 비를 뿌릴 것 같은 하늘빛이니까요. 한 번도 대화를 해본 적 없는 당신께 이 편지를 쓰는 이유는 안타까움 때문입니다. 두 딸의 어머니로서 당신이 노심초사하는 일들이 당신의 얼굴을 어둡게 만드는 것 같아서입니다. 은서... 2013년 태어난 여자 아이 이름 중에서 열 번째로 많은 이름이라지요? 은서가 태어난 2015년에는 그 이름이 인기 있는 여자 아이 이름 순위표에서 더 높은 자리를 차지했을지 모르지만, 그 사실과 은서의 행복 사이에는 아무런 상관관계도 없을 겁니다. 그 시끄럽지만 커피값이 싼 카페에서 나는 여러 차례 당신과 두 딸의 옆자리에 앉는 행운을 누렸습니다. 당신의 아이들은 당..

나의 이야기 2023.12.20

솔 벨로의 문장들3: 노인이 생각하는 것 (2023년 12월 18일)

외출을 하려고 집을 나섰다가 빠뜨리고 온 게 생각나서 돌아갈 때가 있습니다. 젊은이는 '아이쿠, 서두르다 빠뜨렸구나!' 생각하지만 노인은 '나이 때문이구나!' 생각하는 일이 많습니다. 음식을 먹다가 흘리거나 사레들어 고생할 때도 젊은이는 나이 생각을 하지 않지만, 늙은 사람은 나이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노인들은 거의 항상 쌓여가는 나이와 그 나이로 인해 가까워지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죽음이 가까우니 손주를 돌보기보다는 친구들과 놀러 다녀야 하고, 죽음이 멀지 않으니 남의 눈치 볼 것 없이 아무 데서나 큰소리로 떠들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노인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확율의 문제일 뿐, 죽음은 젊고 늙음을 가리지 않고 찾아옵니다. 솔 벨로의 에서 주인공 토미 윌헬름도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 아버지를 ..

오늘의 문장 2023.12.18

솔 벨로의 문장들2: 지금, 여기(2023년 12월 16일)

하늘은 우유 탄 물 빛깔이고, 지붕은 얇게 쌓인 눈으로 덮여 있고, 아스팔트 길은 녹은 눈 덕에 아름답게 검어서 세상은 한 폭 수묵화입니다. 문제 많은 눈이지만 이 눈 덕에 저 풍경을 볼 수 있으니... 감사합니다. 주변에서 늘 감사할 일을 찾아내는 건 일종의 축복이지만, 그 축복을 받는 것은 대개 많은 일, 특히 힘들고 괴로운 일들을 겪은 후 자신의 시선을 바꾼 다음인 것 같습니다. 가 고전의 반열에 오른 것은 무엇보다 그 책이 인생의 아이러니를 아주 잘 포착해내기 때문일 겁니다. 주인공 토미를 등치는 사기꾼이 분명한 탐킨 박사가 인생의 진실을 얘기하는 식이지요. PP. 61-62 I am at my most efficient when I don't need the fee. When I only lov..

오늘의 문장 2023.12.16

솔 벨로의 문장들1: 오늘을 잡아라 (2023년 12월 13일)

서머싯 몸의 에 이어 산책길 동행이 된 책은 솔 벨로 (Saul Bellow: 1915-2005)의 입니다. 이 책에는 표제작인 를 비롯해 네 편의 단편소설과 한 편의 희곡이 실려 있습니다. 산책길 동행이 될 만한 책들 중 이 책이 제일 크고 무거워 망설였지만, 이 단편소설의 첫 문장 때문에 이 책을 선택했습니다. P. 7 "When it came to concealing his troubles, Tommy Wilhelm was not less capable than the next fellow. 토미 윌헬름은 골치아픈 상황을 숨기는 데 있어서는 누구 못지 않았다." 이 문장이 예고하는 대로, 그리고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토미는 악재가 겹친 상황에서 헤어나오지 못합니다. 그에겐 상황의 호전을 ..

오늘의 문장 2023.12.13

노년일기 198: 나이 든 친구들 (2023년 12월 10일)

지난 열흘 동안 세 그룹의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저처럼 비사교적인 사람이 이럴 때 사교적인 사람들의 연말은 얼마나 바쁠까요? 한 그룹은 아이가 중학교 1학년 때 아이 반의 어머니 모임에서 만난 사람들입니다. 아이들이 마흔이 넘었으니 우리 중 가장 어린 사람도 세는 나이로 일흔이 되었습니다. 직장을 다니던 사람들이 은퇴하여, 이제 이 모임은 손자손녀를 키우며 할머니 노릇을 하는 사람들과 손주 없이 할머니가 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들의 대화는 아이들 얘기, 저세상으로 갔거나 이 세상에 있는 남편 얘기부터 대법원장 후보와 대통령 얘기까지 온갖 주제를 넘나듭니다. 또 한 그룹은 옛 직장의 친구들과 그들 덕에 알게 된 친구 모임이었습니다. 최근에 아들을 잃은 친구를 위로하다 각자가 겪은 상실에 대해 얘..

동행 2023.1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