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노년일기 199: 은서 어머니께 (2023년 12월 20일)

divicom 2023. 12. 20. 11:15

은서 어머니, 오늘도 그 베이커리 카페에 오시겠지요?

당신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픕니다. 당신의 예쁜 얼굴은

언제나 곧 비를 뿌릴 것 같은 하늘빛이니까요.

 

한 번도 대화를 해본 적 없는 당신께 이 편지를 쓰는

이유는 안타까움 때문입니다. 두 딸의 어머니로서

당신이 노심초사하는 일들이 당신의 얼굴을 어둡게

만드는 것 같아서입니다.

 

은서... 2013년 태어난 여자 아이 이름 중에서

열 번째로 많은 이름이라지요? 은서가 태어난 2015년에는

그 이름이  인기 있는 여자 아이 이름 순위표에서 더 높은

자리를 차지했을지 모르지만, 그 사실과 은서의 행복

사이에는 아무런 상관관계도 없을 겁니다.

 

그 시끄럽지만 커피값이 싼 카페에서 나는 여러 차례

당신과 두 딸의 옆자리에 앉는 행운을 누렸습니다.

당신의 아이들은 당신처럼 예쁘고 총명하고 귀엽습니다.

예쁘고 귀엽다는 건 그냥 보고 느꼈고 총명하다는 건

오가는 대화를 듣고 알았습니다. (일부러 들은 것은

아니고 바로 옆이다 보니 저절로 들은 것이지요.)

 

발달장애가 감기만큼 흔한 시대에 그런 자녀들을

둔 당신의 행운을 축하하고, 그런 아이들을 이 나라에

낳아준 것에 대해 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당신에게 감사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당신의 행운을 잊은 것 같습니다.

스스로 운좋은 사람이라는 걸 아는 사람이라면 당신처럼

어두운 얼굴을  하지 않을 테니까요.

 

다른 날에도 종종 그랬지만 어제는 정말 마음이 

아팠습니다. 은서는 코가 심하게 막혀 입으로 숨을 쉬고

그러다 보니 자연히 당신이 공부하라고 한 영어책에

집중하지 못했는데, 당신은 아이의 코막힘을 걱정하는

대신 왜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느냐고 야단쳤으니까요.

 

어느 순간 당신이 '은서야, 손이 왜 이렇게 차?' 하고 놀란

소리를 낼 때 나는 이제야 은서 어머니가 은서가 아프다는

걸 눈치채겠구나 생각했습니다. 내가 당신이었다면

나는 바로 아이를 안고 손을 녹여 주었을 겁니다.

그러나 당신은 아이의 손을 녹여 주는 대신 '너 핫팩

어쨌어? 핫팩해!' 질문인지 추궁인지 알 수 없는 말을

했습니다.

 

은서 어머니, 저는 감히 장담할 수 있습니다. 은서는

결코 어제 당신이 보여준 차가움을 잊지 않을 겁니다.

저는 또한 평생 영어로 밥벌이를 한 사람으로서 장담합니다.

은서가 영어를 아주 싫어하게 될 거라는 걸.

 

은서 어머니, 은서는 이제 초등학교 1학년입니다.

영어를 공부하느라 시간을 쓰는 대신 어머니의 사랑과

따스함으로 작은 몸을 채우는 데 시간을 써야 하는

나이입니다.

 

늘 책을 읽는 은서 어머니, 부디 책 읽는 시간을 줄여

아이를 안아 주세요! 먼 훗날 은서가 어머니를 기억할 때

은서의 가슴이 훈훈해지게 해 주세요! 제 가슴에 차오른

슬픔과 분노가 당신에게 말을 걸지 않게 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