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공옥진 선생 별세 (2012년 7월 9일)

divicom 2012. 7. 9. 08:45

1인 창무극으로 잘 알려진 공옥진 선생이 오늘 새벽에 별세하셨다고 합니다. 향년 81세. 


선생은 1933년 3월 전남 승주에서 남도판소리의 대가인 공대일(大一)의 둘째 딸로 태어나 일곱 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창을 익혔다고 합니다. 일본으로 가서 무용가 최승희의 문하에 있었으나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다 귀국하고 귀국 후에는 한동안 전남 영광의 다리 밑에 살며 걸인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1998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영광에서 투병하다 돌아가셨고 빈소도 영광 농협장례식장에 차려졌으니 선생과 영광의 인연이 참 질기다는 생각이 듭니다.


결혼한 적이 있으나 실패하신 후 불갑사(佛甲寺)에서 2년 2개월 동안 수도생활을 했는데 그때의 법명은 수진(秀眞)이었다고 합니다. 1947년에 국극협회·임방울창극단에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김연수 우리악극단, 김월산 여성국악단·박녹주국극협회·조선창극단 등 많은 국악단체에서 비극의 여주인공으로 이름을 떨치셨으며, 1960년대에 들어서서는 영광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다가 1973년 남도문화제를 계기로 '1인창무극'을 선보이셨다고 합니다.


1978년 서울의 공간사랑 등에서 판소리창과 독특한 표정의 ‘병신춤’이 어우러진 1인창무극을 선보이면서 각광을 받았으며, 곱사춤·문둥이춤·앉은뱅이춤·외발춤·덩치춤·동서남북춤·오리발춤 등 기존 57가지에 이르는 종목을 비롯해 허튼춤·턱붙은곱사춤·엉덩이빠진곱사춤·절름발이곱사춤·오리발병신춤 등 수많은 병신춤을 만들어냈다고 합니다.


선생은 해학적인 창무극의 달인으로 이름을 떨치셨지만 그 해학이 ‘병신춤’으로 표현되기까지 선생이 겪으신 신산한 삶을 생각할 때 마음이 숙연해집니다. 브리태니커사전에는 “익살과 청승맞음, 숨김없는 꾸밈새 속에서 천연덕스러운 표정과 몸짓은 걸인생활 속에서 터득한 민중적 세계관과 특유의 흉내 솜씨가 빚어낸 것이다. 그녀는 눈물과 웃음이 별개의 것이 아님을 몸으로 깨친 민중예인으로 평가되고 있다.”고 쓰여 있습니다.


선생은 문순태의 소설 ‘병신춤을 춥시다’ (1982)로 소설의 주인공이 되기도 하고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으나 문화재로 인정받지 못하다가 2010년 5월에야 전라남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셨다고 합니다. 선생에게 후학이 있었는지, 선생의 별세로 '병신춤'이라는 장르가 아주 사라지는 것은 아닌지... 어쨌거나 선생은 자신의 몫을 넘치게 해내셨으니 부디 편히 영면하시길 빕니다. 가혹한 운명의 시험을 예술로 웃어넘기신 선생님, 저희와의 동행, 깊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