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인사동에 나갔습니다. 종일 컴퓨터와 씨름하다 나가니 비마저 반가웠습니다. 저녁 6시 15분 안국동 거리엔 말 그대로 사람의 파도가 일렁였습니다. 모두들 바쁘게 우산을 부딪히며 걷고 있었습니다. 조촐한 모임은 6시 30분에 시작하기로 되어 있어 배고픈 물고기들 사이를 유유자적하는 배부른 물고기처럼 천천히 걸었습니다.
마침 길가 화랑의 윈도우에 여러 색깔이 등장하는 그림이 아름다웠습니다. 여러 가지 재료와 여러 가지 색깔이 섞이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우산을 접고 들어가 크고 작은 그림들을 한참 보았습니다. 입구에 홀로 앉았던 여인과 얘기를 나누다 그녀가 그 모든 그림을 그린 화가 백향기 씨라는 걸 알았습니다. 화랑을 나서는데 저녁 모임에서 만나기로 한 선배가 화랑을 흘깃거리다 저를 보았습니다. 두 번씩이나 반가운 조우를 하게 된 겁니다. 처음엔 그림과 다음엔 선배와.
뜻맞는 세 사람의 저녁 자리는 참 즐거웠습니다. 저보다 훌륭한 분들과 앉아 있으니 그들의 지식과 인격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처럼 제게로 흘러드는 게 느껴졌습니다. 동식물에서 철학, 문학, 시사를 넘나드는 대화에선 제가 좋아하는 김남주 시인 얘기도 나왔습니다. 뛰어난 서정시를 쓸 수 있던 그를 뛰어난 투쟁시를 쓰는 시인으로 만든 시대 얘기도 나누었습니다.
부른 배로 텅 빈 거리를 걸을 때는 제법 마음이 뿌듯했습니다. 세 시간 전 인사동에 도착했을 때의 두통도 온데간데 없었습니다. 어제 나눈 대화 때문인지 오늘 아침엔 다시 김남주의 시를 읽었습니다. 어제 그림을 보아서인지 그의 시 '화가에게'가 눈길을 끕니다. 그의 시집 <나의 칼 나의 피>에서 옮겨둡니다.
화가에게
동해바다
무한한 공간의 저 영원한 침묵
그대로 둬라
섭섭하거든 화가여
꼭 하나 무엇 그려넣고 싶거든
화가여, 저 높은 곳에
천둥이나 하나 큼직하게 달아놓아라
너무 빨리도 말고 너무 늦게도 말고
그것이 시인의 마음이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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