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칼럼

아, 영어! (2부) (2007년 10월 23일)

divicom 2009. 11. 19. 11:44

최근 코엑스에서 열린 유학박람회장엔 겨우 이틀 동안에 35,000명의 학생과 부모들이 전국에서 모여 들었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초등학교도 입학하기 전에 학원에 다니며 영어를 배우는 유아들 중엔 영어 스트레스로 인해 원형 탈모증으로 고생하는 아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자유 칼럼 10월 11일자에 실린 신 아연 게스트 칼럼니스트의 글, “조기 유학, 차마 눈 뜨고 못 볼 일들이…”를 보면 영어 교육을 위해 조기 유학을 가는 아이들이 얼마나 큰 어려움을 겪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자녀들의 영어 교육에 열을 올리는 부모들은 대개 영어만 잘해 가지고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간과합니다. 언어는 지식과 사고를 담는 그릇에 불과합니다. 원어민과 비슷한 영어를 구사한다 해도 그 영어로 표현할 내용, 즉 콘텐츠가 없으면 영어를 못하는 사람과 차이가 없습니다. 반대로 영어가 유창하지 않아도 콘텐츠가 풍부하면 외국 사람들도 알아봅니다. 필요하면 통역을 동원하여 그 사람의 콘텐츠를 얻어내려 합니다.

자녀들이 한국인으로 살아가길 원하는 부모라면 영어를 능가하는 국어 실력이 있을 때에만 자녀의 영어가 빛을 발한다는 걸 인식해야 합니다. 서울의 한 영문 일간지에선 한동안 영어를 잘하는 재미 동포들을 대거 기자로 채용했다가 그 기자들이 우리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람에 낭패를 보았다고 합니다.

지난 달 정부는 “질 좋은” 영어 교육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2013년까지 제주도 서귀포시 일원에 12개의 영어 전용학교로 이루어진 영어 교육 도시를 조성한다고 발표했습니다. 7800억 원을 들여 도시를 조성하고 나면 연간 9000여명의 해외 유학과 연수로 유출되는 3억2000만~5억4000만 달러의 외화를 절감할 수 있을 거라는 게 “정부 관계자”의 얘기지만 영어로 밥 먹고 사는 사람들은 이 계획에 대해 지극히 회의적입니다.

이미 실패로 돌아간 영어 마을들을 보고도 어마어마한 예산이 소요되는 영어 도시 계획을 들고 나오는 이유가 무엇인지, 정말로 해외로 나갈 사람들이 제주도로 갈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 영어를 잘하는 한국 사람을 키우겠다는 건지 반은 한국인이고 반은 외국인이어서 어느 쪽도 아닌 제 3의 국민을 키우겠다는 건지, 지금도 자격을 갖춘 영어 교사가 부족하여 무자격자가 횡행하는데 그 많은 교사를 어디서 구하겠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우리 정부는 언제부턴가 영어와 사랑에 빠져 국어를 홀대해왔습니다. 알파벳은 읽지 못하지만 자녀들을 실력 있는 인재로 키워낸 우리 부모 세대 어르신들은 오늘 날 읽을 수 없는 간판과 표지판 앞에서 당황합니다. 적어도 주권이 있는 나라라면 제 나라 안에서 제 나라말을 하는 국민이 외국어를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불편을 겪고 소외감을 느끼게 해선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이렇게 영어를 강조하는 정부 안에 제대로 영어 실력을 갖추어 그걸 나라를 위해 쓰는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정부가 만들어놓은 웹사이트나 정부 간행물의 영어 수준을 보면 그런 사람이 많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정부가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정책을 고집하니 국민이 국어를 못하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고 영어 못하는 것만 부끄러워하는 게 아닙니까?

요즘은 어떤지 알 수 없으나 제가 도쿄를 방문하던 시절 일본 지하철에선 영어 안내 방송을 하지 않았습니다. 일본 외교관들의 영어 실력은 우리 외교관들을 능가했지만 거리나 상점에서 만난 시민들은 영어를 거의 하지 못했습니다. 일본을 드나드는 서양 사람들은 일본인들이 영어를 못한다고 타박하는 대신 스스로 일본어를 배우려 노력합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지레 영어 못하는 걸 부끄러워하니 서양 사람들도 우리말을 배우려 하기 보다는 영어 안내가 부족하다고 불평을 합니다. 결국 일본인의 영어 실력 부족은 일본에 대한 신비감을 불러 일으키는 데 비해 한국인의 영어 실력 부족은 한국 비하를 조장합니다.

외교관이나 국제 변호사, 무역 종사자들이나 번역가들처럼 영어가 필수인 직업 종사자들은 뛰어난 영어 실력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외국어 고등학교 같은 시설은 원래 그런 직업인을 꿈꾸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만든 “특수 목적 고등학교”입니다. 지금은 정부의 빗나간 정책 덕에 입시 학원으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말이지요. 뛰어난 영어 실력을 가진 전문가들에겐 상응하는 대접을 해주어 사회를 위해 기여하게 하고 다른 사람들은 품위 있는 제 나라 말을 쓰며 각자 할 일을 하고 살면 안될까요? 어중간한 실력을 가진 사람들이 영어를 한다고 행세하며 골목마다 학원을 차리니 영어로 밥 먹고 사는 일이 부끄러울 때가 많습니다.

쓰다 보니 처음에 우려했던 대로 “어떻게 해야 영어를 잘할 수 있냐?” 는 질문에 대한 답에서 많이 벗어나고 말았습니다. 역시 저부터 국어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해야겠습니다.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는 글을 쓰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