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미술은 문턱 높은 미술관을 벗어나 시민의 삶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사간동의 갤러리 현대에서 2월 27일까지 계속되는 장욱진 선생 전시회의 입장료는 삼천원(학생 이천원), 덕수궁 옆 서울시립미술관에서 3월 27일까지 열리는 마르크 샤갈 전시회는 만이천원(청소년 만원)을 내면 관람할 수 있습니다. 협찬하는 기업들이 여럿인데도 입장료가 만만치 않으니 그런 기업이 없었으면 더욱 비쌌겠지요?
장욱진 선생 전시회는 선생님이 돌아가신 지 20년이 된 것을 기념하는 행사입니다. 어린이, 나무, 새, 가족 등 일상적 이미지를 '소박하고 정감있게' 표현한 선생님의 유화와 먹그림 70여점을 볼 수 있습니다. 지극히 단순한 그림들이지만 가만히 들여다 보면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단순하기 때문에 거기에 마음껏 상상을 얹어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쓰여진 것보다 쓰여지지 않은 게 더 중요하다고 했던 철학자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빌려, 그려진 것보다 그려지지 않은 것, 그래서 보는 이가 채워넣을 수 있게 한 게 더 중요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요.
코리아타임스 기자 시절 선생님을 뵌 적이 있습니다. 1987년 5월 대학로 두손갤러리 전시회 때였습니다. 인터뷰를 하고 싶어 화랑에 전화를 하니 선생님은 기자들과 만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신다고 했습니다. 남들이 하고 싶어하고 부러워하는 서울대학교 교수 노릇을 스스로 그만두고 조용한 곳에서 그림에만 전념하신 분이니 기자 혐오가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기자 만나기를 좋아하는 사람보다 기자 만나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끌렸습니다. 전시회 하루 전인가 이틀 전에 무조건 갤러리로 갔습니다. 화가들이 자신의 전시회가 시작되기 전 마지막 점검을 위해 갤러리에 온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가기 전에 선생님에 관해 구해볼 수 있는 책과 자료를 모두 읽어본 후에 갔습니다. 선생님을 만나지 않아도 선생님에 대해 긴 기사를 쓸 수 있을 만큼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꼭 당신의 그림처럼 비장식적인 분이었습니다. 그림에 꼭 필요한 선만 있는 것처럼 몸에는 불필요한 살이 한 점도 없었습니다. 당신의 그림을 보시는 선생님 옆에서 한참 그림을 보다가 "요즘도 약주 많이 하세요?" 본래 아는 사람처럼 말씀을 건넸더니 "웬걸요. 이젠 늙어서..."하시는데 그 웃음도 꼭 당신의 그림처럼 천진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근 두 시간가량 계속되었고 마침내 제 정체(?)를 밝혔지만 노여워하시진 않았습니다.
유명한 분들 중엔 가끔 허명(虛名)이 섞여 있는데 선생님은 당신의 그림처럼 '참'만 있는 분이었습니다.
지금 갤러리 현대에서 하는 전시회에 맞추어 큰따님인 장경수 선생이 어느 인터뷰에서 "아버지는 언행이 일치하는 분"이었다고 회고한 것을 보았습니다. 비록 긴 일생에 비추어 찰나 같은 만남이었지만, 그 만남을 통해 저도 선생님은 언행일치를 이루신 분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장욱진 선생님의 그림을 보시지 않은 분들은 꼭 한 번 가보시기 바랍니다. 특히 자신의 마음, 자신의 삶이 너무도 복잡하다고 생각하는 분들께 권합니다.
샤갈 전시회도 꼭 한 번 보시면 좋겠습니다. 한때는 샤갈의 그림을 이루는 빛깔들을 우리 주변에서 종종 볼 수 있었지만, 이제 그렇게 아름다운 색은 모두 사라진 듯합니다. 지금 창밖에만 해도 온통 뿌연 하늘과 회색 건물들 뿐이고 눈에 띄는 빛깔이라고 해야 교회의 붉은 십자가나 미술의 격에는 영영 도달할 수 없는 페인트칠이 고작이니까요. 샤갈 전시회를 가는 사람은 시립미술관 2층에서 천경자 선생의 작품들까지 볼 수 있으니 그야말로 일석이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장욱진, 천경자, 샤갈... 그림을 들여다보다 보면 어느 순간 그분들의 마음을 채웠던 것들, 그분들이 꿈꾸었던 것들이 읽혀집니다. 그림을 소개하는 전문가들의 글을 읽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는 열심히 보다 보니 무언가를 읽어내게 되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천재적인 분들이 평생을 진력하여 이루어낸 예술품을 삼천원, 만이천원을 내고 볼 수 있으니,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는 참 운좋은 '보통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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