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누구나 각자의 개인적 목표, 희망, 전망 따위를 상상하고, 그것을 위해 한없는 노력을 기울여 행동으로 몰고 가게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를 둘러싼 비개인적인 것, 다시 말해서 시대 자체가 겉보기에는 매우 활기를 띠고 있더라도 사실 내면적으로는 아무 희망도 전망도 없는 경우, 즉 시대가 희망도 전망도 없이 절망에 빠진 것을 암암리에 알게 되고, 우리가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시대에 대한 어떤 형태의 질문 -- 즉 일체의 노력과 활동이 갖는 '궁극'의 초인적인 절대적 의미에 관한 질문에 그 시대가 헛되이 침묵을 계속한다면, 그런 상황은 어느 정도 성실한 인간에게는 어떤 종류이든 하나의 마비 작용을 일으키고 말 것이다. 게다가 이 작용은 개인의 정신적, 도덕적인 면에서부터 마침내는 그 휵체와 논리적인 면에 이르기까지 번져 나갈지도 모른다.
'왜'라는 질문에 대해서 시대가 납득할 만한 대답을 주지 않는데 현재 주어진 역량을 웃돌 만큼 현저한 업적을 올리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매우 희귀한, 저 영웅의 정신적 고독과 결단 내지는 끈질긴 생명력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 한스 카스토르프는 그런 것은 한 가지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설사 아무리 정중하게 표현하려고 해도 그는 역시 '범인'일 수밖에 없었다."
-- 토마스 만의 <마의 산 1권>에서 인용.
독일의 소설가이며 비평가인 토마스 만 (Thomas Mann: 1875 – 1955)은 1912년부터 <마의 산: The Magic Mountain: Der Zauberberg>을 쓰기 시작하여 1924년에 출판했습니다. 이 소설 집필 도중에 1차대전이 발발하여 집필이 지연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가 1929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데는 이 작품의 공이 클 것입니다.
스위스의 결핵요양소를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20세기 가장 중요한 독일 문학작품으로 일컬어지는데, 고전으로 평가받는 작품들이 왕왕 그렇듯이, 읽기가 힘들다고 하는 독자들이 많습니다. 저도 이삼십 대에 이 책을 몇 장 읽다가 중단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다시 읽어보니 조금도 어렵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주 재미있습니다. 다만 위에서 보듯, 너무 원문에 충실한 번역이 즐거운 독서를 방해하는 것 같습니다.
매일 무수한 책들이 태어나 짧고 긴 생애를 마치고 사라집니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의 작품은 그나마 근근히 살아남지만, 그런 인정을 받지 못한 책들은 태어난 후 이레도 안되어 파지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등상을 받는 아이만 살아갈 가치가 있는 게 아니듯, 그렇게 사라지는 책들 중에도 읽어볼 만한 책들이 적지 않을 겁니다. 또, 이 작품처럼 한때는 지루해보이나 언젠가는 즐거움을 주는 책들도 있을 겁니다. 그러니 백화점 같이 화려한 서점에서 누울 곳을 찾지 못한 책들이 아주 사라지진 말고, 어디 누추한 창고에서나마 살아 있기를 바랍니다. 청계천의 헌책방들이 그리운 가을의 초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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