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고추를 말리는 계절이 돌아오고
사람들은 또 나이먹을 걱정을 합니다.
낙엽과 어울리는 빛깔의 옷을 입고 계절과 친한 척도 해보고,
더러는 봄날 같은 차림을 하고
지는 한 해를 거부하는 몸짓도 해봅니다.
한 겹 두 겹 벗어두었던 입성들을 주워들다 보면
밀린 방학숙제처럼 삶에의 의문들이 하나 둘 떠오릅니다.
대개는 시간이 자기에게 얼마나 무용(無用)하였는가를 깨닫기도 할 것이고
어떤 이들은 그래도 이것 한 가지는 배웠다고 득의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반복은 있으되 발전은 없는 것이 우리 삶의 역사이고,
모든 변화란 것이 한 무변(無變)한 세상의 겉핥기에 불과하다면,
절기의 흐름에 크게 마음 둘 일은 아닐 것 같습니다.
그저, 가을 바람 흔드는 대로 조금씩 아파하는 영혼들이 있다면,
깊어가는 달밤 그늘에 가슴 속에 있는 말들 쏟아 놓으며,
이 세상에는 자기 맘 같이 아픈 마음이 저 별만큼 많음에 위로받기 바랍니다."
-- 김흥숙 산문집 <시선(視線)>에서 인용.
<시선>은 1998년에 펴낸 책입니다.
우연히 펼쳐 들었는데 전편에 흐르는 심각함이 미소를 자아냅니다.
진지하되 심각할 필요는 없다는 걸, 당시의 제가 몰랐던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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