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문장

광복절, 그리고 참깨 들깨(2019년 8월 15일)

divicom 2019. 8. 15. 15:32

입추 말복 지나고 나니 매미도 아나 봅니다, 여름이 끝나가고 있다는 것을.

비가 올 때조차 짝을 부르는 매미의 절박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오늘은 광복절, 태극기를 내걸며 생각합니다.

저 태극기를 지키려고, 혹은 저 태극기 때문에 고통 속에 살던 사람과 죽어간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니 무언가를 안다는 것은 고통을 안다는 것이고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고통을 나누고 싶어한다는 것이겠지요.


광복 기념일이 다가오며 일제강점기 유린당했던 사람들이 끝없이 떠올라

큰소리로 웃을 수도 없었는데, 오늘 아침 경향신문에 실린 임의진 목사의 '시골편지'를 읽으면서는

웃지 않을 도리가 없었습니다. 여러분도 함께 웃으시길 바라며 그 편지를 여기 옮겨둡니다.

엄숙한 광복절이지만 기쁜 광복절이기도 하니 잠깐 웃는 것은 괜찮겠지요?



임의진의 시골편지]참깨 들깨

임의진 목사·시인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게 깨다. 깻대는 심을 때부터 목숨 줄이 간당간당하다. 겨우 살아남은 야문 무리가 솟구친다. 가장 덥고 습한 장마와 여름을 나게 된다. 베어지면 곧바로 햇볕에 바짝 눕게 된다. 가장 뜨거운 아스팔트나 마당에다가 넌다. 잘 마르면 다음 순서, 죽도록 두들겨 패기. 바깥주인이 때리고 안주인이 때리고 개가 밟고 지나가도 욕을 먹지 않는 게 깨 털기다. 뒤지도록 두들겨 맞는 도리깨질이 끝나도 수난은 더 이어진다. 이제는 까불기. 돌조각이라도 있을까봐 바람에 까분다. 더러 땅바닥에 동댕이질. 그러고 나면 가장 센 불에 올라가 볶임을 당할 차례. 기름이 되는 녀석들은 쥐여 짜는 고문을 당하게 되는데, 고소한 참기름을 불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이건 그러니까 참기름이 아니라 피눈물이렷다. 당신의 시골 어머니가 보내오는 참기름은 이런 지난한 과정을 거친 결과물임을 아는가 모르는가.

더운 날 다리 밑에서 천렵놀이. 뱃살 번진 아재들 사우디 건배사. ‘사’나이 ‘우’정 ‘디’질 때까지. 흥을 돋우면 아낙들도 이에 뒤질세라 아우디. ‘아’줌마 ‘우’정도 ‘디’질 때까지. 그러고는 뒤끝에 비빔밥을 쓱쓱 만다. 죽을 뻔했다가 살아난 질긴 목숨의 참기름을 쭈욱 두른다. “요거이 차이나 아니여. 니뽕거 아니여. 국산 로컬이여.” “알았어 알어.” 박수들을 친다. 고소하고 맛나고 질긴 우정들아. 사랑들아.

엄마 냄새. 참기름 냄새. 아이들도 엄마표 비빔밥을 좋아해. 이 고소한 밥을 안 먹고 단것만 찾으면 저만 병나고 손해지. 언젠가 북청사자놀이를 현장에서 봤는데, 사자탈을 벗은 아재들이 구석지에서 참기름에 비빔밥을 말아먹는 풍경. 잊지 못한다. 큰 양푼에다가 같이들 우걱지걱 비벼 먹는 저 힘. 저 기운. 어려움도 슬픔도 이겨내는 신명이었다. 참깨 들깨 나누며 함께 견디고 함께 넘어온 아리랑 고개.

참깨 들깨 수확 철이다. 차를 몰다가도 마을길에 깻대가 널어져 있으면 조심조심. 두들겨 맞을 일을 생각하면 또 불쌍불쌍.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8142036015&code=990100#csidx90b3ecb5b0d0c70a6e132e193ddeb5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