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문장

시인의 죽음, 그리고 '죽은 시인의 사회'(2019년 7월 30일)

divicom 2019. 7. 30. 11:07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시대이지만 

어떤 이의 죽음은 왈칵 솟구치는 눈물처럼 갑자기 찾아옵니다. 

황병승 시인의 부음도 그랬습니다.


시인은 본디 장수가 드문 종족일 뿐만 아니라

오늘날과 같은 사회, 즉 시(詩), 그 '언어의 절간'이 

사라져가는 사회에서는 더더욱 오래 버티기 어렵겠지요.


황병승 시인은 지난 24일 숨진 지 보름 만에 발견되었지만

마음 쓰지 않을 것 같습니다.


마침내 자유로워진 시인의 안식을 빌며,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이병철 시인의 글을 옮겨둡니다.

이 시인은 아래 글에서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라고 썼는데

정말 그럴까요?



[시선]시인의 ‘죽음’

이병철 시인

시를 쓰려고 책상 앞에 앉아 있는데 어디선가 유리 깨지는 소리가 났다. 한 부음이 생각의 유리창을 깨고 날아온 것이었다. 깨진 유리 같은 장면들이 떠올랐다. 몇 번 지나치듯 본 것 말고는 풍문으로만 그를 알았다. 죽음 앞에선 할 말이 없어 내 시를 쓰는 대신 그의 시를 읽었다. 나름의 애도로 오후가 깊어지는 동안 비가 쏟아졌다. 시인의 죽음에 세상은 빗소리처럼 와글거렸다. 지나가는 비였다.

[시선]시인의 ‘죽음’

죽은 시인은 숨을 거둔 지 보름 만에 부모에게 발견됐다. 장마철 더위와 습기에 죽어서도 괴로웠을 것이다. 아들의 비참한 주검을 눈앞에서 본 부모에게도 슬픈 악취에 젖은 연립주택은 지옥이었으리라. 고독사라고 했다. 불쌍하게 죽었다고 했다. 누군가는 사회적 타살이라고도 했다. 굳이 그 죽음을 명명해야 한다면 어떤 수사도 없이 그저 ‘시인의 죽음’이라고 하고 싶다.

황병승은 2000년대의 아이콘이었다. 낯설고 파격적인 문법으로 독자들을 당혹하게 하고 또 매혹했다. 20대 습작 시절에 그의 시를 읽은 내 또래 문학청년들에게 시집 <여장남자 시코쿠>는 경전과도 같았다. 그는 슈퍼스타였고, 일찍 신화가 됐다. 그런데 이제 보니 어디까지나 우리끼리 얘기였다. 황병승 신드롬은 단지 문학이라는 동네에서 일어난 조금 특별한 사건이었을 뿐이다.

부음을 듣고 놀라 주변에 소식을 전했는데, 황병승이 누군지 모르는 것이었다. 뉴스 댓글에도 생뚱맞은 말들이 많았다. 황병승이 생경할 정도라니, 대중과 문학의 간극이 얼마나 넓은지 새삼 알았다. 시인은 죄를 짓거나 쓸쓸하게 죽어야만 실시간 검색어에 오를 수 있는 걸까. 일찍 죽은 시인들은 많은데 사람들은 윤동주와 기형도만 기억할 뿐 박정만, 진이정, 신기섭, 박서영은 모른다. 시는 낡고 오래된 위상만 있지 파급력은 없다. 그런데 또 막상 그렇지도 않다. 우리나라는 시가 꽤 맹렬히 소비되는 나라다. 시집이 그나마 팔리고, 지하철 여기저기 시가 붙어 있고, 시를 소재로 한 영화와 드라마도 만들어진다. 시인 명함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무척 많다. 페이스북에 오른 부고에 달린 수백개 댓글들을 보다 깜짝 놀랐다. 전부 다 시인이었기 때문이다. 저마다 대학에서, 대학원에서, 창작센터에서, 문화센터에서, 술자리에서, 문단 모임에서 만난 황병승을 잘 안다며 고인을 회고하는 것이었다. 추모의 시를 지어 올리는 분도 계셨다. 이상하다. 황병승 시인은 아무도 찾지 않는 극심한 고독 가운데 쓸쓸히 죽었다고 들었는데,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시인의 죽음이 대중이 문학을 외면한 결과라든가 생계 곤란을 겪는 예술가에 대한 지원 부족이라든가 누구 말마따나 사회적 타살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의 죽음엔 개인적 요인이 일정 부분 작용했고, 그것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는 편이 나을 듯하다. 황병승 시인의 죽음이 아닌 ‘시인의 죽음’을 말하기 위해서다. 시가 넘쳐나고, 어디에나 시인들이 가득한 ‘시인들의 사회’에서 시인은 왜 가장 가난할까? 시인은 왜 일찍 죽고 쓸쓸하게 죽고 여러 번 죽고 아무 때나 죽고 아주 죽는 걸까? 시는 있는데 시인은 없고, 대중은 있는데 독자는 없고, 예술을 사랑한다는 사람들은 많은데 예술에 대가를 지불하는 사람들은 적다. 영화 제목인 ‘죽은 시인의 사회’는 비유적 의미이지만, 진짜로 시인이 죽어가는 사회는 누가 만든 것일까. 시인들 스스로가 만들었을까? 글쎄,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

오르한 파묵의 소설 <내 이름은 빨강>에서 죽은 자는 독백한다. “나는 지금 우물 바닥에 시체로 누워 있다. 마지막 숨을 쉰 지도 오래되었고 심장은 벌써 멈춰버렸다. (…) 어쩌면 벌써 나의 부재에 익숙해졌는지도 모르지. 빌어먹을! 여기 이렇게 누워 있으니 내가 두고 온 삶이 아무 일도 없는 듯 계속되고 있으리라는 생각마저 든다”라고. 죽은 시인은 말이 없지만, ‘죽은 시인의 사회’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잘 굴러가고, 시인들은 계속 죽을 것이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7262037005&code=990100#csidx09751ff3d5a423d85bf7aaca5d225f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