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젠 모처럼 경복궁 역 부근에 나갔습니다.
공기는 맑고 하늘은 푸르고 거리엔 이상한 한복을 입은 귀여운 젊은이가 많았습니다.
그들 사이를 즐겁게 거닐다가 이내 소음에 시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카페에 앉아 있는데도 큰소리로 외치는 구호가 귓전을 울렸습니다.
자유한국당이 주최한 시위라고 했습니다.
황교안 대표와 나경원 원내대표의 궤변에 박수를 치는 사람들...
두 사람 다 탄핵당한 바근혜 전 대통령의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벌써 잊은 사람들...
'표현의 자유' 덕에 난무하는 궤변... 시민들이 정신을 차리는 수밖에 없겠지요.
아래는 어제 경향신문에 실린 칼럼입니다.
사유와 성찰]가해자의 ‘표현의 자유’, 불가능해야 한다
몇년 전 프랑스의 풍자전문 시사지 ‘샤를리 에브도’에 대한 테러사건이 벌어졌을 때 세계의 많은 이들은 표현의 자유를 위협하는 테러리즘에 분노했다. 권위주의적 통치세력의 언론통제와 근원적으로 다르지 않은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전 세계의 많은 언론들이 이 테러에 대해 비판을 가했고 한국의 무수한 언론들도 이런 기조의 외신을 그대로 받아 비슷한 논조의 기사들을 쏟아냈다. 또 프랑스인들을 포함한 서구의 많은 이들, 그리고 한국사회의 많은 시민들이 ‘내가 샤를리다’ 캠페인에 동참했다. 테러에 대한 분노가 세계를 결속시킨 것 같았다.
그런데 테러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던 문제의 만화 컷을 보면서 적지 않은 이들이 혼란에 빠졌다. 기독교도들에게 예수와 비교되는, 이슬람 종교성의 절대적 중심인 무함마드가 알몸으로 엎드려 있고 그 뒤에서 백인 남자로 보이는 카메라맨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영상을 찍고 있는데 그를 향해 무함마드가 “내 엉덩이 맘에 들어?”라고 말한다. 이것도 표현의 자유일까?
나와 같은 의문이 유럽에서도 제기되었다. 무수한 이슬람 사회들이 유럽 제국들에 의해 강제로 병합돼 장기간 식민지 지배를 당한 역사를 공유하고 있다. 독립국가가 된 이후에도 유럽은 이들 지역에 대한 막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며 그 나라들의 건강한 발전을 방해했다. 그 결과 독립국가가 된 후에도 이들 중 많은 나라들에서 구조화된 빈곤은 물론이고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폭력이 난무했다.
요컨대 세계의 무슬림들 다수는 서구제국들의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인 피해자들이다. 5·18 피해자 같은 국가폭력의 직접 피해자들에 관한 연구를 보면 그들이 겪는 트라우마는 매우 심각하여 삶이 송두리째 파괴되어 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한데 가족이나 친지, 친구 등과 같은 간접 피해자들에게서 존재의 왜곡현상이 더 심각하다는 연구보고도 있다.
비단 사람만이 그런 피해 증후를 겪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회도 그렇다. 때로는 사회가 사람들 각각의 내면의 왜곡보다 더욱 심각한 왜곡을 담보하곤 한다. 해서 그 사회가 사람들을 더욱 파괴하는 데 일조한다. 식민지에서 독립한 무수한 사회들이 그렇다. 그런 점에서 식민지를 겪은 사회의 일원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간접 피해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슬람 사회의 많은 이들이 그들을 식민지배했던 나라들로 이주하여 하급 노동시장으로 편입되어 들어갔다. 그것은 자국사회가 식민지 피해 증후로 빈곤이 악순환하고 사회정치적 폭력이 난무한 탓이다. 식민지 가해국으로 노동이민을 간다는 것은 굴욕적이지만, 그럼에도 장기간의 식민지배 결과 언어소통이 가능하고 사회문화적 여건이 크게 다르지 않아 다른 사회로 유입되어 가는 것보다 편리한 점도 있다.
문제는 유럽으로 간 이들 이슬람의 노동이민자들 다수가 유럽사회의 빈곤층으로 편입되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문화적 편견도 겪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적지 않은 무슬림들은 자존성이 무너지고 때로는 자아 파괴의 극단적인 존재론적 위기에 내몰렸다.
그런 이들에게 그들 자신과 그들의 조상들의 종교였던 이슬람교는 일종의 존재의 구명줄과 같은 것이다. 한데 샤를리 에브도의 만화는 그런 자존성의 근원을 바닥까지 후려쳤다. 성찰적인 유럽의 백인엘리트들은 ‘말할 수 있는 권리’를 지키기 위해 신랄한 풍자가 때로 불편하더라도 충분히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겠지만, 이슬람 이민자들, 특히 자아 해체 위기에 직면한 이들에게는 그것은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2012년에 그 만화를 담은 잡지가 발간되고 무수한 항의와 사과 요구가 빗발쳤음에도 그 잡지는 말할 것도 없고 유럽사회 대다수는 그것을 자신의 시선에서 표현의 자유라고 얘기했다. 3년이 지나도록 말이다. 테러는 그렇게 발생했다. 하여 이 부적절한 행위에 대해 ‘내가 샤를리다’ 캠페인은 ‘그들만의 대안’일 뿐 상처 입은 식민지 대중에게는 전혀 동의할 수 없는 것이다.
일본 정치인들의 막말을 떠올린다. 유럽사회가 보다 은밀히 문화적 제국주의를 드러내온 반면, 일본 정치인들은 훨씬 노골적으로 제국적 주체임을 드러낸다. 타자를 정복하고 파괴한 것은 그들의 권리라고 믿는 것이다.
한국은 다른가. 한국사회도 사과해야 하는 이웃나라들이 있지만 사과하지 않았다. 한편 비슷한 일이 한국 보수정치인들의 입에서 자국민을 향해 끊임없이 터져나온다. 5·18 망언, 세월호 망언 등이다. 아직 다행인 건 한국의 직간접 피해자들은, 깊은 상흔을 안고 살아왔음에도, 테러리스트가 되기로 선택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곁에 있는 시민사회는 가해자의 막말이 ‘표현의 자유’로 포장되지 않도록 날카로운 비판을 멈춰선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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