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짧은 여행의 기록(2019년 2월 18일)

divicom 2019. 2. 18. 08:37

별로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라 그럴까요?

금요일(15일) 아침에 떠났다가 토요일 저녁에 돌아왔는데

아주 긴 여행을 한 것 같습니다.


아름다운서당의 영리더스아카데미(YLA: Young Leaders' Academy) 겨울캠프에

다녀왔습니다. 캠프는 일주일 동안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에 있는 

경기도 청소년수련원에서 열렸습니다. 주소는 안산이지만 사실은

대부도여서 안산에서도 한참 멀었습니다.


그곳에서 YLA 장충반, 삼청반, 인천반, 울산반, 부경대반의 학생들을 만나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와 세익스피어의 4대 비극을 함께 공부했습니다.


떠나는 새벽 서울에 눈이 내렸지만 가면서 보니 다 녹고 없었습니다.

청소년수련원에는 아예 눈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청소년수련원 본관 202호가 제 숙소였는데

보일러가 고장났는지 난방이 잘 되지 않았습니다.

이층 침대가 두 개, 네 개의 침대 중 한 칸에 이불 세 필로 둥지를 만들어

그 속에서 자는 둥 마는 둥 했습니다.


공항이 가까운지 밤새 비행기 소리가 났고

고양이의 울음도 그치지 않았습니다.

저들이 우는 건 울분 때문일까, 사랑 때문일까,

존재의 슬픔 때문일까...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질문의 책입니다.

책을 읽다 보면 무수한 질문이 일어납니다.

답을 찾으려 애쓰는 90명의 학생들이 참으로

어여쁘고 귀여웠습니다.


세익스피어의 비극은 반면교사들의 무대입니다.

자신들처럼 살지 말라고, 복수하려 하지 말라고(햄릿),

질투는 우리 자신과 우리가 질투하는 대상 모두에게 해롭다고(오셀로),

권력은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저지르게 하니 맹목적으로 좇지 말라고(맥베스),

사랑, 늙음 등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정신을 바싹 차리고 임하라고(리어왕).


금요일 밤새 잠을 설치며 벽과 벽 틈으로 들어오는

찬 바람 맛을 보다가 토요일 새벽 일찍 일어났습니다.


아, 창 밖에 눈으로 덮힌 하얀 세상이 눈부셨습니다.

서둘러 짐을 챙겨들고 눈밭으로 나갔습니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에서 강아지처럼 뛰었습니다.

가슴 속에서 솟구쳐 올라오는 행복감이 온몸을 감쌌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애무를 교환할 때 느끼는 행복감이 pleasure라면

가슴 속에서 솟구쳐 올라 오는 행복감은 joy입니다.

joy를 느끼는 시간이었습니다.


수업이 끝난 후 학생들과 함께 대절 버스를 타고

신도림역으로 갔습니다. 

텅빈 눈밭을 보며 희열을 느꼈던 눈엔

어디론가 가느라 바쁜 사람들이 가득 담겼습니다.

신도림역은 참으로 복잡했습니다.


너무 많은 것을 보아서인지

눈이 매우 피곤했지만 잠은 쉬이 들지 않았습니다.

청소년수련원의 추운 방에서 몸에 들어온 추위도

떠날 줄을 몰랐습니다.


그래도 일요일은 어머니를 만나는 날,

어머니와 전화 통화를 하면서야

오빠가 입원한 것을 알았습니다.


동생과 어머니를 만나 점심을 먹고

세브란스병원으로 오빠 문병을 갔습니다.

심한 고통의 시간은 지나고 느리게나마

회복 중이라고 하니 불행 중 다행이었습니다.


돌아오는 길, 햇살은 따스해도

바람은 차가웠습니다.


온 주말 내내 대전에서 해산을 기다릴 친구를 생각했습니다.

친구 또한 YLA 출신이니 겨울캠프에서 줄곧 생각나는 게 당연했습니다.

예정일이 일주일 이상 지났는데 분만 소식이 없으니 

기도하고 또 기도했습니다.


캠프로 떠날 때부터 컴퓨터 앞에 앉지 못해

일요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 잠시 컴 앞에 앉았습니다.

이메일을 여니 기다리던 소식이 와 있었습니다. 

대전 친구가 아기를 낳았습니다!


인생은 사는 시간, 자는 시간, 기다리는 시간으로 이루어진 것인지 모릅니다.

사는 시간엔 가능한 한 현명하게 시간과 에너지와 감정의 낭비를 줄이도록 노력하고,

기다리는 시간은 기도하며 보내면, 자는 시간에 깊은 잠을 잘 수 있겠지요.

물론 잠자는 방이 경기도 청소년수련원 202호처럼 춥지 않다면.^^


YLA겨울캠프에서 만났던 모든 친구들, 병원에서 보았던 환자들과 보호자들,

대전의 친구를 비롯해 막 아기를 낳은 산모들...

두루 평안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