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문장

<아리랑>, 신흥무관학교, 육군사관학교(2017년 12월 13일)

divicom 2017. 12. 13. 10:42

오랜만에 쨍!하게 추운 날씨... 노점과 밖에서 일하는 분들을 생각하면 미안하고 마음이 아프지만, 

저 추위 덕에 죽을 더러운 것들이 있으니 한편으론 감사합니다. 


추위는 병균을 죽이는 데는 효과적일지 모르나 뻔뻔한 자들을 손보진 못합니다. 

어제 자유한국당의 원내대표 선출 결과만 보아도 추위의 역할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새로 그 당의 원내대표로 선출된 사람은 김성태 씨, 그는 지난해 4.13총선을 앞두고 

소위 '강서 르네상스'공약을 내놓으며 가양2동에 국립한방의료원을 건립하겠다고 했습니다. 

그가 의료원을 설립하겠다고 한 부지는 공진초등학교가 있던 자리입니다. 

서울시교육청은 공진초등학교의 폐교 후 그 자리에 장애인을 위한 특수학교를 짓겠다고 예고한 바 있었습니다. 

그러나 김성태 씨는 법적으로 병원을 지을 수 없는 그 부지에 병원을 짓겠다고

거짓 약속하여 강서구민들의 박수를 받으며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습니다. 


지난 9월 강서구 탑산초등학교에서 '강서지역 공립 특수학교 신설 주민토론회'가 열렸을 때 

김성태 씨는 금뱃지를 달고 참석했지만 그 모임으로 인해 강서구는 

장애인 특수학교를 거부하는 지역으로 지탄받았고, 장애인 자녀를 둔 학부모들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지역 주민들에게 학교 설립을 허락해달라고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입장이 난처해진 김성태 의원은 슬그머니 빠져나갔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김성태 씨가 어제 자유한국당의 원내대표로 선출됐습니다. 

이 사람은 홍준표 계로 노동운동가 출신이라는데, 이 사람이 어떤 노동운동을 했는지 궁금합니다. 

물론 젊었을 때는 지금보다 나은 사람이었을 수도 있겠지요. 늙어가며 악화되는 인물이 한둘이 아니니까요.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왜 천재들이 요절하는지, 왜 훌륭한 사람들 중에 오래 사는 사람이 적은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악화되지 않고 늙지 않기 위해 서둘러 떠나는 것이 아닐까요?


일찍 떠나간 위인들 중에는 우리 사회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특히 남북 분단으로 인한 이데올로기적 판단이 무엇보다 앞서면서 

친미, 자본주의자가 아니었던 사람들은 크게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중 한 사람은 <아리랑>의 주인공 독립운동가 김산입니다. 


엊그제 육군사관학교가 독립운동가를 키우던 신흥무관학교의 정신을 계승하겠다고 하는 얘기를 들으니 

제일 먼저 김산이 떠올랐습니다. 육군사관학교가 신흥무관학교의 정신을 계승하려면 

가장 먼저 <아리랑>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에도 어딘가에 쓴 적이 있지만 <아리랑>을 읽지 않고서는 이 나라의 역사에 대해 얘기할 수 없습니다.

<아리랑>은 미국의 언론인 님 웨일즈가 김산을 인터뷰하여 쓴 책입니다.


마침 한국일보 박광희 논설위원이 신흥무관학교와 김산, 그리고 <아리랑>에 대해 

칼럼을 썼기에 아래에 옮겨둡니다.

그런데 한국일보는 참 이상합니다. 

신문에서 읽은 이 칼럼을 한국일보 웹사이트에서 찾으려니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이 신문의 구독을 그만둘까 말까 고민 중인데... 

박광희 논설위원의 글 같은 글이 가끔 실리니 그만 볼 수도 없고... 한국일보의 각성을 촉구합니다.


 


[지평선] 신흥무관학교와 육군사관학교

의열단 의백 김원봉과 항일 혁명가 김산(본명 장지락)의 인연은 만주에서 시작됐다. 경남 밀양 사람인 김원봉과 평북 용천 출신의 김산이 한반도 북쪽 저 먼 곳으로 달려간 것은 거기 신흥무관학교가 있었기 때문이다.

김원봉은 중국 금릉대학을 다니다 말고 무장투쟁을 하겠다며 그곳으로 넘어갔다. 그보다 일곱 살 어린 김산은 나이 열다섯에 입학했다. 입학 허용 연령을 세 살이나 밑돌았지만 입학시켜 달라고 울며 버틴 끝에 석 달짜리 단기 과정에 특례로 들어갔다. 두 사람은 나중에 상해에서 의열 투쟁을 함께 한다.

▦ 열혈 청년들의 가슴을 뒤흔든 신흥무관학교는 백사 이항복의 후손인 이회영 형제, 독립운동가 이동녕 그리고 안동 출신인 김대락 이상룡 김동삼 등이 서간도로 집단 망명한 뒤 항일전사를 키우기 위해 1911년 설립했다. 김산의 삶을 그린 ‘아리랑’에는 학과는 새벽 4시 시작하며 학생들은 게릴라 전술을 익히고 강철 같은 근육을 키운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군사 교육뿐 아니라 국사와 지리 교육도 활발했다. 그러나 자금 부족으로 학생들 먹이고 입히기가 힘겨웠으며 학생들도 이를 알고 괭이질을 하며 농사일을 했다.

▦ 김경천 지청천 이범석 등 교관들은 쟁쟁했다. 일본 육군을 탈출한 김경천은 훗날 흰 말을 타고 만주와 연해주 일대를 누벼 ‘백마 탄 장군’ ’조선의 나폴레옹’으로 불렸다. 북한 김일성은 가짜고 김경천이 진짜 김일성이라는 말까지 있었을 정도다. 역시 일본 육사 출신으로 요코하마의 묘지에서 김경천과 만나 조국 현실을 슬퍼하며 통곡한 지청천도 교관으로 합류했다. 중국 운남육군강무학교 기병과를 수석 졸업한 젊은 교관 이범석은 단연 학생들의 우상이었다. 그러나 학교는 일본의 무자비한 탄압에 1920년 문을 닫는다.

▦ 수천 명에 이르는 졸업생은 훗날 무장 전사 혹은 비밀결사대원이 돼 일제와 싸운다. 신흥무관학교가 없었으면 청산리대첩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말도 있다. 그렇다면 자랑스러운 역사로 받아들여야 마땅하나 이상하게도 육군은 신흥무관학교와 독립군의 계승에 소극적이었다. 한국전쟁을 거치며 친일 인사가 육군의 요직을 차지한 것과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 있다. 그런 점에서 육군사관학교가 11일 신흥무관학교 등 독립군 관련 학술대회를 연 것은 이례적이다. 육사는 학술대회에서 조명된 역사와 정신을 계승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박광희 논설위원 khpark@hankookilbo.com

http://hankookilbo.com/v/3ba6e6dd540a4b17b5d74c683f9be8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