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문장

임은정 검사가 옳았다(2017년 9월 30일)

divicom 2017. 9. 30. 11:16

며칠 전 다시 한국일보 구독을 중단해야 하나 생각했습니다. 

미국 현지 시각 25일 오전(우리 시각으로 25일 밤)에 북한의 리용호 외무상이 미국 워싱턴 밀레니엄힐튼 

유엔플라자 호텔에서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그는 "미국이 선전포고를 한 이상 미국 전략폭격기들이 설사 

북한 영공을 채 넘어서지 않는다 해도 모든 자위적 대응권리를 보유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은 미국의 폭격기들이 북한 영공에 들어오지 않고 한국의 하늘을 난다 해도 북한에서 그 폭격기들을 

격추시킬 수 있다는 뜻이니 매우 중요한 얘기입니다. 그런데 그 기사를 당연히 실었어야 할 26일 자 

한국일보에는 그 기사가 실리지 않았습니다. 집에서 구독하는 다른 신문에는 그날 실렸는데, 한국일보에는 

그 다음날에야 실린 것입니다. 인터넷판에는 26일 새벽에 기사를 올리면서도 종이신문에는 싣지 않은 겁니다. 그 기사를 넣으려면 한밤중에 이미 인쇄한 종이신문의 일부를 바꿔야 하고, 그렇게 하면 일도 늘어나고 비용도 

추가되니 그 기사를 넣지 않은 것이겠지요. 종이 한국일보에는 그 기사가 27일에야 실렸습니다. 


인터넷 뉴스를 보지 않거나 다른 신문을 보지 않고 한국일보만 보는 독자는 그 뉴스를 남들보다 하루 늦게 알게 된 것입니다. 연예인의 사생활 같은 것은 하루 늦게 알든 이틀 늦게 알든 상관없지만 한반도의 운명에 영향을 

주는 중요한 뉴스를 하루 늦게 알게 되었다면 해당 신문의 구독을 중단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신문'이라면 밤에 판을 바꿔 추가했어야 할 기사를 넣지 않고 하루 늦게 신문에 쓰기로 한 결정을 누가 했는지 

궁금합니다. 이 신문의 새 소유주가 된 동화기업의 '경제적 판단'이 신문사 편집국에 스며든 것인지 어떤 특정

인사가 그런 결정을 했는지... 디지털 시대 신문의 힘이 약해지는 건 미디어의 변화뿐만 아니라 신문의 태도에도 원인이 있겠지요. 


구독 중단을 권하는 여러 가지 사건들에도 불구하고 아직 한국일보를 구독하는 이유는 이충재 수석논설위원 같은 필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만난 적은 없지만 늘 그를 응원하며, 아래에 그가 오늘 신문의 '지평선' 칼럼에 쓴 글을 옮겨둡니다.



임은정 검사가 옳았다

”오늘 특히 민감한 성폭력 사건 재판이 있었다. 법정을 가득 채운 농아자들은 수화로 소리 없이 울부짖는다…이들 대신 싸워 주는 것. 그리하여 이 세상은 살아 볼 만한 곳이라는 희망을 주는 것. 내가 할 일을 당연히 해야겠지.” 

2007년 일명 ‘도가니사건’의 공판검사를 맡은 임은정 검사가 당시 심경을 적은 글이 공개되자 큰 반향이 일었다. 그에게는 검찰총장상이 수여됐고, 얼마 뒤에는 ‘우수여성검사’라는 영예까지 주어졌다. ‘유능한 검사’였던 그가 졸지에 퇴출대상으로 분류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2012년 9월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른 박형규 목사의 긴급조치위반 사건 재심을 담당하면서 ‘백지 구형’이 아닌 ‘무죄 구형’을 한 것이 눈밖에 났다. 무죄가 뻔한 데도 검찰이 잘못을 인정하기 꺼려 판사에게 선고를 일임해 온 백지 구형의 관행을 깼다는 이유였다. 임 검사는 3개월 후 윤길중 진보당 간사의 재심 사건에서도 “무죄가 분명한 사안을 판사에게 넘기는 것은 옳지 않다”며 다시 무죄 구형을 했고, 검찰은 이번엔 4개월 정직이라는 중징계를 내렸다. 소신을 굽히지 않은 임 검사는 징계처분 취소소송을 내 1ㆍ2심에서 승소했고 현재 대법원의 최종 판단을 기다리는 중이다.

▦ 법무ㆍ검찰개혁위원회가 29일 임 검사에 대한 징계조치를 시정하고 실질적 피해회복 조치가 이뤄져야 한다고 권고했다. 임 검사에 대한 상고 취하와 함께 지휘권 오ㆍ남용 여부도 확인하라고 주문했다. 잘못된 관행을 고치려 한 임 검사의 손을 들어주면서 백지 구형을 강요한 검찰 상부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판단이다.

▦ 임 검사는 검찰의 부끄러운 민낯이 드러날 때마다 비판의 목소리를 내 왔다. 진경준 검사장 뇌물수수 사건 때는 “권력을 좇는 부나방들이 금력 역시 좇는 것은 당연한 속성”이라고 비판했고,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 영장 기각 후에는 “우병우의 공범인 우리가, 우리의 치부를 가린 채 우병우만을 도려낼 수 있을까”라고 개탄했다. 임 검사는 한 인터뷰에서 “검찰이 우병우나 황교안 전 법무부 장관 때문에 망가진 게 아니다. 위에서 시키는 일에 기꺼이 굴종해 온 사람들과 방관해 온 이들, 그렇게 우리 모두 직간접적인 부역자로서 책임이 있다”고 했다. 정의와 원칙대로 살아가려는 검사가 더 많아져야 검찰이 바로 선다.

이충재 수석논설위원 cjlee@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