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공중(公衆)’이라는 용어가 있다. 정치는 정치인에게 맡긴 채 ‘공적인 이슈’에는 관심을 쏟지 않는 시민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하지만 대의민주주의에서 시민의 대표가 개인이나 특정 집단, 지역의 이익을 대변하면서 민의를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래서 등장한 개념이 여론(Public opinion)의 수렴이었다.
일찍이 조지 갤럽은 여론조사를 ‘대표(Sampling) 국민투표제’라 지칭하면서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할 직접민주주의의 수단”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여론조사는 이슈의 쟁점도 모른 채 그저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을 응답하는 표피적인 의사표현이다. 어떤 경우엔 자신의 무지를 노출하기 싫어 모르는 사안을 아는 것처럼 대답하기도 한다. 예컨대 ‘존재하지도 않는 법안의 폐지를 묻는 가짜 설문조사에 무려 3분의 1가량이 적극적인 의사표시를 했다’는 조지 비숍의 흥미로운 연구결과도 있다.
그래서 대의민주주의의 보완재로 새롭게 등장한 것이 제임스 피시킨의 공론(Public judgment)조사이다. 대표성을 갖춘 시민 간 집중적인 토론을 통해 형성된 ‘공론’을 확인하는 것이다. 특히 원전과 사용후 핵처리 문제와 같은 사회적인 갈등을 빚는 민감한 사안의 경우 시민들은 ‘국외자’로 폄훼되기 일쑤였다. 전문적인 분야로 치부됐기에 논의 과정에 참여할 방법도 없었다. 그러나 공론조사를 벌이면 시민대표는 찬반 양측이 벌이는 토론을 지켜보고, 제공된 균형 잡힌 자료를 면밀히 검토한 다음 사회적인 합의를 도출하게 된다. 숙의에 참여하지 않은 시민들도 TV 생중계를 통해 양측의 논리를 공부할 수 있다.
1996년 미국 텍사스주에서 ‘전력공급’을 주제로 실시한 공론조사는 매우 유의미한 결과를 나타냈다. ‘재생에너지를 위해 매월 1달러 이상의 전기요금 인상을 지지하겠는가’라는 설문조사를 두 차례 했는데, 공론조사 전과 후의 ‘지지’ 응답이 달랐다. 조사 전(58%)보다 후(81%)가 23%포인트나 급증했다. 공론조사가 사익에만 매달린다는 평을 들었던 시민들의 잠재된 ‘공공의 선’ 심리를 자극한 것이다. 이번에 원전을 둘러싸고 벌이는 공론조사 역시 ‘강한 민주주의’를 공부할 기회로 삼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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