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엔 텔레비전을 별로 보지 않지만 누워 앓을 때는 좋은 친구가 됩니다. '열기 충만'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면 가만히 누워 텔레비전을 봅니다. 그러다 잠이 들면 몸 상태가 많이 나아지기도 합니다. 그럴 때 재미있게 보는
프로그램 중 하나는 jtbc의 '비정상회담'입니다. 재미있는 이유는 여러 나라 사람들이 어떻게 다른지 또 어떻게 같은지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피부색이나 인종, 출신 지역과 상관없이 사람은 같고 또 다르다는 것이지요.
한국은 경제력으로는 세계 10위 권이라지만 세계를 인식하는 능력은 180위 쯤 되는 나라입니다. 한국에서는 5백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개인이 선택하지 않고 타고 난 조건들, 예를 들면 혈연이나 외모같은 것이 그 사람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일이 흔합니다. '성공'에 대한 강박, 유명세(브랜드)에 대한 경모도 여전해서 성공한 유명인이 있으면 그 사람과 자신, 혹은 이 나라와의 인연을 들먹이는 일이 많습니다. 한국에서 태어나 외국으로 입양돼 성장했거나 성공한 사람 중엔 이 '비굴한' 한국적 기질을 경험한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겁니다.
몇 해 전 프랑스에서 플로르 펠르랭이라는 사람이 장관 직에 올랐을 때도 한국의 언론은 비슷한 '인연 찾기'에 바빴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성공한 한국인 입양아가 아니고 뼛속까지 프랑스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조선일보
김수경 기자가 그를 인터뷰해 쓴 기사를 옮겨둡니다. 이 기사를 읽으며 부끄러워 하는 한국인이 많았으면, 부끄러운 '인연 찾기' 좀 그만두었으면 좋겠습니다. 기사 원문과 펠르랭의 사진은 아래 주소에서 볼 수 있습니다.
http://v.media.daum.net/v/20170617030448847
"성공한 한국인 입양아? 난 뼛속까지 프랑스 사람"
2012년 한국은 비행기로 12시간 떨어져 있는 프랑스 중소기업디지털경제부 장관의 취임으로 들떠 있었다. 프랑스 사회당 후보인 올랑드 대통령이 선거에서 승리한 직후였다. 좌파 정권이 집권한 건 프랑스에서 17년 만의 일이었다. 독일과 더불어 유럽 내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프랑스의 정권 교체였지만 한국의 관심은 동양인 외모의 이 39세 여성 장관에게 집중됐다. 단발로 똑 자른 새까만 머리카락과 그에 대비되는 흰 얼굴, 까만 눈동자와 얇은 속쌍꺼풀이 진 눈까지, 동양계 최초로 프랑스 장관에 임명된 그는 누가 봐도 한국 여성이었다. 외모와 달리 그의 이름은 발음조차 힘든 플뢰르 펠르랭(44·Fleur Pellerin)이었다. 생후 6개월 때 한국에서 프랑스로 입양된 그는 지난 2012년 5월 중소기업디지털경제부 장관을 시작으로 2016년까지 통상관광부 장관과 문화부 장관을 지냈다.
작년 2월 장관직에서 물러난 뒤 그는 프랑스 IT산업 발전을 위해 '코렐리아캐피탈'을 세웠다. 작년 말부터 한국 기업 네이버·라인과 손잡고 유럽, 특히 프랑스의 스타트업을 발굴·투자하는 일을 하고 있다. 지난 9일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그에게 한국 입양아로 유럽 선진국에서 장관직에 오른 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소감을 물었다. 그의 대답은 냉정했다.
"태어난 곳은 여기일지 모르지만 난 뼛속까지 프랑스인입니다. 한국인들이 나를 성공 신화의 주인공으로 봐주는 것은 고맙지만 나는 한국인이 아니에요." "친부모를 찾아볼 생각이 없느냐"는 물음에 그는 대답했다. "없습니다."
그의 대답엔 한순간의 망설임이 없었다. 한국인들로부터 수십 번 들은 질문이었는지 '친부모'란 단어를 꺼내자 문장이 끝나기도 전에 "없다(No)"는 답이 튀어나왔다. 그의 머릿속 한국은 '나를 낳아준 나라'가 아니라 '아시아에 있는 작은 나라' 정도인 것 같았다. 우리 국민을 '한국인'이라고 칭하며 이어가는 그의 말투는 약간 매정하게 들릴 정도였다.
"나는 뼛속까지 프랑스인"
그녀에게 매정했던 건 태어난 나라 한국이었다. 1973년 8월 29일은 길에 버려진 그가 발견된 날이다. 태어난 지 3~4일쯤으로 추정되는 여자아이였다. 6개월쯤 지났을 무렵 그녀는 하얀 강보에 싸여 양어머니 애니 펠르랭 품에 안겼다. 김종숙이 플뢰르 펠르랭으로 다시 태어난 순간이었다. 그 이후로 그녀는 한 번도 한국에 발 디딘 적이 없었다. 2013년 3월 본지가 주최한 '제4회 아시아리더십콘퍼런스' 기조연설을 맡아 방한했던 게 처음이었다. 프랑스로 입양된 지 40년 만이었다.
태어난 나라에 돌아온 그의 첫 번째 일정은 한국에 있는 프랑스 기업인들과의 만찬이었다. 자신이 입양된 홀트아동복지회를 찾거나 자신이 발견됐던 동네에 들르는 일 같은 건 일정에 없었다. 그는 당시에도 "내가 태어난 곳을 방문하게 돼 설렌다"면서 "나를 낳아준 부모가 누군지는 관심 없다"고 선을 그었었다. 그는 이후에도 한동안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장관직에서 물러난 뒤 지난 9월 우리나라 기업과 사업 파트너를 맺었다. 그 이후 1년에 5~6번씩 이런저런 이유로 한국을 찾고 있다. 지난 3월엔 서울 DDP에서 열린 국제건축심포지엄에 참석했다. 사진을 찍자고 다가가는 한국인들을 상대해 주기도 하고 연설 중간중간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한국이 제법 익숙해진 것 같았다.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여러 가지 일을 하나 봅니다.
"지금은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하고 있어요. OIF(Organization International of Francophonie·프랑스어권 국제기구) 홍보대사로도 일하는데 평창올림픽 때 프랑스어가 원활하게 사용되고 프랑스어의 가치를 격상시키도록 기획하는 거죠. 다양한 곳에서 강연도 하고 있지만 사실 코렐리아캐피탈 대표직이 가장 주된 일이에요. 네이버에서 1230억원 정도를 투자받았고 이 돈으로 프랑스와 유럽에 있는 IT 스타트업 회사를 발굴하는 거죠. 괜찮은 회사로 판단되면 투자도 아낌없이 하고요. 여러 가지 일을 하지만 어떻게 보면 모두 한국과 프랑스 사이 가교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죠."
―그런데 왜 하필 한국 기업과 일하기로 했나요?
"한국이기 때문이 아니라 아시아 시장에 관심 있는 유럽 IT 기업들이 한국을 선호하기 때문이에요. 빠른 인터넷과 삼성전자 등 IT 기업이 탐낼 만한 아주 발전된 시장이라는 뜻이죠."
―상대방은 당신이 한국인이라 더 편하게 생각할 것 같습니다만.
"저는 전혀 상관없지만 그들은 그렇게 느낄 수 있어요. 내가 갖고 있는 동양인의 외모가 백인이나 라틴, 혹은 흑인 등 서양인 외모보다 더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한국에선 어디 출신이다, 누구의 혈육이다라는 걸 워낙 따지잖아요. 내 외모가 한국인들에게 부담 없다면 사업 파트너로서 저한테 해가 될 건 없죠."
―한국이라는 게 중요한 요소는 아니었군요.
"그렇죠. 한국에 오면 사람들이 자꾸 '네가 어디서 태어났는지 궁금하지 않으냐', '엄마가 누군지 알고 싶지 않으냐'고 묻지만 나의 아버지 어머니는 내 나라 프랑스 파리에 있는, 나를 키워주신 두 분뿐이에요."
그와 그의 부모를 연결해준 홀트아동복지회는 친부모를 찾아주는 일을 할 때 철저히 입양자 본인 의사만을 고려한다. 친부모가 그를 찾고 싶다고 해도 그가 동의하지 않으면 연결해주지 않는다. 그는 친부모를 찾으려고 시도한 적도 없고 계획도 없다고 했다.
항상 최고 성적 유지한 엘리트
2013년 이후 한국을 15번쯤 방문했지만 그는 여전히 한국에 대해 마음의 문을 열지 않은 것 같았다. 그의 웃음소리는 유쾌했지만 속내는 그렇지 못한 게 아닐까. 동양인 입양아로 낯선 프랑스에서의 삶이 힘들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궁금해졌다.
―어떤 가정에서 자랐나요?
“아주 평범하고 경제적으로도 크게 여유롭지 못한 집에서 컸어요. 어린 시절을 보낸 곳도 파리 변두리에 있는 조용한 동네였고요. 아버지는 핵물리학 공부를 해서 박사학위까지 받으셨지만 어머니는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한 분이에요. 아주 가난한 집 첫째로 태어나서 16세 때부터 공장에서 돈을 벌어야 했대요. 나와 내 여동생을 키울 때는 줄곧 주부였고요.” 그의 여동생도 한국에서 입양됐다.
―특별하지 않은 가정에 입양된 아이가 스스로의 힘으로 장관이 된 거군요.
“프랑스에선 가능합니다. 교육 제도가 잘돼 있기 때문이죠. 일단 고등학교까지는 무조건 무상교육이에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그랑제콜이라고 부르는 전문분야 학교에서 공부하려면 학비를 내야 하긴 하지만요. 그건 선택하는데 달린 거죠.”
―크면서 인종차별을 당한 적은 없습니까.
“내가 느낀 바로는 없었어요. 특히 나 같은 경우는 학교에서도 성적으로는 항상 선두 그룹에 들었고 대학에 들어간 시기도 또래보다 2년쯤 빨랐기 때문에 나를 무시할 수는 없었겠죠.”
대부분의 프랑스인이 18세 때 치르는 프랑스 고교 졸업시험 바칼로레아를 그는 16세에 합격했다. 3년제 일반 대학교에 다니는 대신 그는 프랑스에서 최우수 학생들만 입학한다는 프레파 과정을 선택했다. 그랑제콜 준비 단계 학교다. 그랑제콜은 우리나라로 치면 전문대학원 과정과 비슷하다. 2년간의 프레파 과정을 수료한 그는 프랑스 상경계 그랑제콜에서 최상위권인 에섹(ESSEC) 비즈니스 스쿨에 입학했다. 21세에 에섹을 졸업한 그는 경제 정책 등을 공부하기 위해 또 다른 그랑제콜인 시앙스포(Sciences Po·파리 정치대학)에 들어갔다. 시앙스포 졸업 후 정계 진출의 꿈을 안고 ENA(국립행정학교·École nationale d’administration)에 진학한 그녀는 감사원에서 근무하면서 소수자 차별을 반대하는 NGO 등에서 활발한 활동을 했다. 2002년 사회당 대선 캠프에서 연설문 작성에 참여하면서 현실정치에 발을 들여놓았다.
―사회에 진출한 다음에도 편견은 없었나요?
“있었겠죠. 동양인이기 때문은 아니었어요. 취업 시장에서 차별을 받았을 수도 있었겠지만 저는 공무원 시험을 보고 합격해 인종으로 평가받을 기회가 없었어요. 어쩌면 여성이라는 것 때문에 차별이 있었을 수는 있어요. 고위공무원 세계에선 프랑스도 조금은 남성 지배적인 분위기가 있거든요.”
그가 장관으로 임명됐을 때 프랑스 현지 언론은 “가난한 나라에서 입양된 동양 여성이라는 점이 다양성을 추구한 올랑드 내각과 맞아떨어졌다”고 썼다. 그 역시 작년 2월 문화부 장관에서 물러나면서 “개발도상국 빈민촌에서 태어나 프랑스 평범한 가정에 입양된 어린이가 문화부 장관이 될 수 있는 나라는 세계에 거의 없다”고 말했다.
12세 딸은 한국에 관심 많아
―장관으로서의 삶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단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건 장관이라는 자리가 지구상에서 가장 힘든 자리라는 겁니다.” 그가 혀를 내둘렀다. “보람은 있었죠. 특히 내가 주장하던 정책이 실현되면 말이죠. 하지만 그 자리에 있으면 항상 ‘기대에 못 미친다’는 이야기를 들어야 해요. 정책을 강력하게 밀고 나가면 ‘너무 성급하다’고 하고, 좀 천천히 바꾸려고 하면 ‘너무 느리다’고 비판하지요. 뭔가 바꿔보려고 하면 설득을 해야 하고 어떤 경우엔 나와 같은 정당에 속한 사람들까지 공격을 해왔습니다. 쓸데없이 힘 빼는 언쟁도 있었죠.”
그는 전남편과 사이에서 얻은 딸 베네리스(12)와 변호사이자 고위 공무원인 남편 로랑 올레옹(48), 로랑이 전처와 낳은 아들 둘과 함께 살고 있다.
―처음 장관이 됐을 때 딸이 어렸겠군요.
“그때 아이가 일곱 살이었어요. 장관으로 일하는 동안은 일과 삶 사이 조화 같은 건 꿈도 못 꿨지요. 4년 반 동안 집에 거의 들어가지 못했는걸요. 바쁘긴 엄청 바쁜데 엄마로서 죄책감이 들었어요. 내가 당신보다 나은 삶을 살기를 바라는 우리 엄마조차 ‘딸과 시간을 좀 더 보내렴’ ‘베네리스에게 좀 더 신경 써라’라고 조언했으니까요. 그런데 딸아이가 다행히(웃음) 책을 좋아하고 학교 숙제도 스스로 하는 자율적인 성격이에요. 집을 비우면서 알게 됐죠. 딸아이 덕분에 오히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커리어를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요.”
―딸이 오히려 한국에 관심이 있다고 하던데요.
“특히 한국어에 관심이 아주 많아요. 아이에게 너의 4분의 1은 한국에서 왔다고 설명해 줬거든요. 아이들과 함께 한국으로 휴가를 오기도 했어요. 특히 남편의 아들들이 18세, 16세인데 되게 별종(geek)이거든요. 한국도 그런 별종 문화가 많잖아요. 아이들과 함께 설악산과 제주도에도 갔었어요. 남편과 아이들도 독특하다며 흥미 있어 했고요.”
한국 영화와 음악 파워에 놀라
―굳이 ‘나는 한국인이 아니고 프랑스인’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우리나라(프랑스)는 정치·사회적 합의가 국민의식의 바탕이 되는 곳이에요. 내가 태어난 곳은 한국이지만 17세기 철학을 바탕으로 하는 나라에서 교육을 받았고 평생 살았기 때문에 그 인식이 깊숙한 곳에 박혀 있는 거죠. 생후 6개월 만에 입양됐는데 기억이 있을 리도 없지 않나요? 참, 신기한 점은 하나 있어요.”
―무엇인가요.
“한국과 프랑스가 아주 비슷하거든요. 특히 두 나라 사람들이 삶을 즐기는 방식이 정말 닮았어요. 축하할 일이 있으면 친구들을 불러서 파티를 연다든지, 음식 먹고 술 마시고 노래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측면에서도요. 지중해적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독특한 유럽 문화가 한국에도 있더라고요.”
―술도 마시고 노래도 합니까?
“한국에 들를 때마다 노래방에 가요. 엄청 재밌어요. 한국 노래는 못 하지만 소리 높여 팝송을 부르죠. 한국에서 사귄 친구들과 소맥도 즐겨 먹어요. 작년엔 소맥 빨리 마시기 대회 같은 데도 나갔었어요(웃음).”
―한국 영화나 음악에도 관심이 있습니까.
“최근에 영화 ‘옥자’를 만든 감독이 누구더라? 아! 봉(준호) 감독! 그가 만든 ‘괴물’이라는 영화를 아주 감명 깊게 봤어요. 조금 폭력적이지만 감각적인 박찬욱 감독 영화도 인상 깊었고요. 박 감독은 2주 전 칸 영화제에서 만나 점심을 함께 먹었어요. 칸 영화제 심사위원이더라고요. 한국 영화는 그 예술성이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어요. K팝도 마찬가지죠. 박근혜 대통령이 파리에 왔을 때 K팝 콘서트가 열려 함께 갔는데 그때 깜짝 놀랐습니다. 프랑스 10대 소녀들이 한국어 가사를 전부 외워 따라 부르더라고요. 소리 지르고 눈물까지 흘리면서요. 최근 1~2년 사이 프랑스에서 한국어 인기가 일본어를 눌렀어요. 한국어 가사나 영화 대사를 이해하기 위해서 한국어를 배우죠. ‘한류 파워’라고 할 수 있죠.” 그는 ‘한류’라는 단어만큼은 또박또박 말했다.
―한국어를 배울 생각은 없나요?
“언젠가는 배워보고 싶어요. 장관으로 일할 때는 너무 바빠서 배울 시간이 없었어요. 어릴 적엔 새 언어를 배운다는 게 굉장히 쉽고 당연한 일이었는데 지금은 나이가 들다 보니 노력을 쏟아야 하더라고요. 제 버킷 리스트에 ‘한국어 배우기’가 들어 있어요.”
“한국에서 컸다면 장관이 됐을까요?”
―당신의 삶을 ‘인생 역전’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솔직히 고백하자면 내 앞에 놓인 한계를 치열하게 극복하면서 살아오지는 않았어요. 프랑스는 한국과 달리 어린아이에게 학교 성적에 대한 스트레스를 주는 나라가 아니니까요. 오히려 입양되면서 경제적으로나 정치·사회적으로 더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내가 입양된 게 1970년대였는데 당시 한국은 굉장히 가난하고 정치적으로도 불안정한 나라였으니까요.”
―입양됐기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까.
“내 친부모는 아마 한국에서 아주 가난하고 교육도 제대로 받지 않은 사람들이었을 확률이 높아요. 그렇지 않았다면 갓 태어난 아기를 길에 버리진 않았을 테니까요. 그런 가정환경과 한국 특유의 경쟁적이고 억압적인 문화에서 컸다면 한국에서 장관을 할 수는 없지 않았을까요?”
그가 코를 찡긋하며 웃었다. “친부모가 갓 태어난 아기를 길에 버렸다”는 그의 말이 귀에 맴돌았다. 그녀의 삶 전체가 비로소 이해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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