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아름다운서당'의 서재경 이사장님이 청와대 안팎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극(笑劇)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글을 오늘 아침 한국일보에 쓰셨습니다. 깊이 있는 글은 읽지 않으려 하는 게 요즘 세태이지만 꼭 한 번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서 선배님은 제가 존경하는 언론계 선배이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명저를 내신 저자로, 지난 10월에는
<제목이 있는 젊음에게>라는 제목의 책을 상재하셨습니다. 한국일보에 쓰신 글이 허핑턴포스트에도 실렸기에
아래에 옮겨둡니다.
http://www.huffingtonpost.kr/jaekyoung-suh/story_b_13891230.html?utm_hp_ref=korea
http://www.hankookilbo.com/v/7296d25a1128427686b7f76f91c1fe2e
아이히만과 박 대통령의 사람들
한나 아렌트는 1961년 루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보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의 진부성에 대한 보고'를 뉴요커지에 발표하여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아렌트는 독일태생의 유대인으로 대학에서 철학과 정치사상을 공부했다. 아이히만은 패전 후 해외로 피신했으나 15년 만에 체포되어 재판에 부쳐졌다. 아렌트도 한때 수용소 생활을 거쳐 미국에 망명한 사람이기에 아이히만 재판은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아렌트는 뉴요커지에 자진하여 기고문을 쓰고 싶다는 제안을 했고, 주목받던 정치철학자의 기고 제안에 뉴요커는 대환영이었다.
아이히만은 2차대전 중 독일과 독일 점령하 유럽 각지의 유대인 체포, 강제이주를 계획하고 실천에 옮긴 인물이다. 패전 후 그는 교황청의 도움으로 적십자 여권을 얻어 가족과 함께 아르헨티나로 도망해 리카르도 클레멘트라는 가짜 이름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 근교 자동차 공장 기술자로 은신하고 있다가 이스라엘 정보부 모사드의 끈질긴 추적 끝에 체포됐다. 그는 유대인 600만명 학살 혐의를 받고 있었다.
재판에서 아이히만은 자신을 이렇게 정당화했다. "나는 법에 따랐을 뿐이다. 나는 유대인을 직접 해치지 않았다. 나는 포로를 실은 열차가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 못했다. 열차의 행선지는 내 임무와 상관없는 일이다. 열차 행선지나 포로들의 장래는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포로 열차가 제시간에 출발하는 것이었다. 이 모든 행위는 독일제국을 위한 것이었다. 나는 누구보다 내 임무에 충실했다. 당시 나에겐 총통의 지시가 법이고 진리였다. 그러므로 나는 죄가 없다. 법과 명령에 따라 행동했으므로."
비판 여론이 끓어 올랐고 유대인들은 분노했다. 사죄하고 용서를 빌어도 시원치 않을 흉악범이 오히려 뻔뻔하게 변명을 늘어놓는 것에 온 세상이 놀랄 지경이었다. 그러나 한나 아렌트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재판을 지켜보며 그녀는 아이히만이 정말 별거 아닌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아이히만에게서 저지른 악행에 비해 너무 평범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녀가 보기에 그는 피에 굶주린 악귀도, 냉혹한 악당도 아니었다. 그냥 우리 주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아저씨였다. 아렌트는 이렇게 적었다. "그는 마치 유령처럼 피고석에 앉아 있었다. 그는 더 이상 무서운 존재도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계속되는 심문에 '익을 때까지 구워지는 고기가 된 느낌'이라고 불평했다. 그는 단지 명령을 받았고 그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반복해서 주장했다. 그는 악마가 아니었다. 정말 믿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는 자신이 저지른 일과 자신의 책임을 연결 짓지 못하는 아이히만에게서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을 끌어냈다. 악이란 뿔 달린 악마처럼 별스럽고 괴이한 존재가 아니라, 사랑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우리 가운데 있다는 것이다. 아렌트는 사람들이 대체로 악을 초자연적인 어떤 것, 즉 사탄의 체현(體現)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으나 아이히만은 이런 깊이에 이르지 못했다고 적었다. 그리고 인류역사에 오래 기억될 엄청난 범죄의 원인을 아이히만이 '사유'할 능력이 없었다는 데서 찾았다. 아렌트는 이렇게 주장했다. "사유의 바람이 드러내는 것은 지식이 아니다. 사유는 옳은 것과 그른 것, 아름다운 것과 추함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다."
아렌트가 비극의 원인을 사유 부족에 둔 것은 그녀의 스승이자 평생의 연인이기도 했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에게서 받은 영향이 컸을 것이다. 하이데거는 그녀에게 이렇게 사유를 설명하곤 했다. "사유는 과학처럼 우리를 지식으로 이끌지 않아. 사유는 우리에게 유용한 처세술을 가르쳐주지도 않지. 사유로는 세상의 수수께끼를 풀 수 없어. 또 사유는 행위를 할 어떤 직접적인 힘도 제공해 주지 않아. 그러나 우리는 활동하기에 살아있고, 사유하는 존재이기에 생각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최순실 사태로 나라가 벌집 쑤셔 놓은 형국이다. 요란한 언론 보도와 검찰 수사에 이어지는 청문회, 그리고 특검에 이르기까지 여러 현상을 보면서 한나 아렌트를 줄곧 떠올리게 된다. 과연 사유능력이 박약한 박근혜를 캐스팅하여 대통령 자리에 밀어 올린 세력들은 사유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을까. 박근혜의 비정상적 행태를 익히 알만한 거리에 있으면서도 단지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침묵의 카르텔을 공고히 한 사람들에게 사유능력은 정상적이었을까. 한나 아렌트가 이번 최순실 사태를 지켜보았더라면 아무런 죄의식도 반성의 기미도 보이지 않는 대통령의 사람들에게서 필경 아이히만이 보인 사유 부재를 다시 보았노라고 고백했을 것이 틀림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