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문장

조영래 (2016년 12월 13일)

divicom 2016. 12. 13. 18:19

1990년 어제 제가 존경하는 조영래 변호사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쓴 <전태일 평전>을 읽고 눈을 뜬 맹인 아닌 맹인들이 저 말고도 많을 겁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가 그렇게 서둘러 떠나 버린 게 이 나라의 비극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래는 한국일보 최윤필 선임기자가 '기억할 오늘: 12 12'에 쓴 '조영래'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독재의 야만과 싸우며 인간에 대한 신뢰와 희망을 잃지 않기 위해 맨 먼저 자신의 영혼 속 가장 깊은 곳 "가장 맑고 신선한 숨결"을 지키고자 했던 인권변호사 조영래가 1990년 12월 12일 숨졌다. 자료사진.

사법연수원생 조영래(1947~1990)의 1981년 12월 13일 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이제 어느덧 조금씩 타성이 붙어가는 듯하다. 묶여 온 사람들을 바라보는 전율도 이젠 점차 각질화되어 일상의 무감동에 조금씩 조금씩 압도되어 간다.”

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돼 6년여 간 도피생활 하던 그가 80년 복권돼 뒤늦게 사법연수원서 마지막 실무를 익히던 때였다.

“나로서는 권력을 향유하는 최초의 체험.” 그는 “이 기회를 내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가장 맑고 신선한 숨결로 부딪쳐 나아가 최선의 것을 이루어내야 한다고 마음먹고는 있다”고 적었다.

중형이 예상되는 한 폭력 전과자의 사례를 두고 그는 한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 없이 중형을 매겨야 하는 현실이 “때로 죽음처럼 어둡고 쓸쓸하게 느껴진다”고도 썼다. 그리고 이렇게 썼다. “내가 준행(遵行)하려고 하는 제일보는 피의자 또는 참고인, 가족들에게 친절히 대하는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라도 친절한 자세를 흩뜨리지 않도록. 어떤 경우에도 조금이라도 권력을 가진 자의 우월감을 나타내거나 상대방을 위축시키거나 비굴하게 만드는 일이 없도록.(…)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인간성에 거는 우리의 모든 신뢰와 희망은 대체 어떻게 될 것인가.”

조영래는 경기고 3학년이던 1964년 6ㆍ3항쟁에 가담했다가 정학 당했고, 이듬해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김근태 손학규 등과 한일기본조약 반대, 삼성 사카린밀수 규탄, 6ㆍ8 부정선거 및 3선개헌 반대 등 시위를 주도했다고 한다. 71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문재인 박원순 등과 사법연수원(12기)에 들지만, 그는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으로 구속, 1년6개월 징역형을 받았다. 만기 출소한 지 1년 만에 다시 민청학련 사건이 터지면서 그는 수배자가 됐다. 기약 없는 도피 생활 중 그는 전태일 평전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을 썼다.

83년 시민공익법률사무소를 설립한 그는 여러 민생ㆍ시국 사건을 잇달아 맡아 국가폭력에 맞섰다. 84년 정부 상대 망원동 수해주민 집단 손해배상소송, 86년 여성조기정년제 차별 철폐소송, 86~88년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그는 1990년 12월 12일, 폐암으로 별세했다. 향년 43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