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문장

영어, 그리고 장기영과 방우영(2016년 5월 21일)

divicom 2016. 5. 21. 08:48

어젯밤엔 대학생들과 영어 실력을 키우는 법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늦게야 돌아왔습니다. 


세 시간의 만남에서 제가 강조했던 것은, 영어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말고 우리말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 하라, 영어를 '공부'하지 말고 재미 있게 즐겨라, 네이버나 다음 대신 Google이나 Wikipedia를 이용하라, 학원에 가지 마라, 영어를 잘하고 싶으면 매일 적어도 30분 동안 소리내어 읽고(자기 목소리가 자기 귀에 또렷이 들리도록), 적어도 30분 동안 영어로 쓰인 글(재미있는 책)을 눈으로 보아라, 매일 한 줄이라도 영어로 생각을 표현하라,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들다고 생각할 때 전 지구의 주민들, 훨씬 나쁜 상황에서 힘겹게 생활하는 사람들을 생각하고 죽을 때까지 죽지 마라, 등이었습니다. 


어제 동국대학교 사회과학관 M127 교실에 모였던 친구들 중 단 한 사람이라도 저와의 만남이 유익했다고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어제 만난 친구들 중엔 언론계로 나가려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누구보다 더 상식과 논리적 사고를 늘리는 데 힘써야 할 겁니다. 


어젯밤 만난 친구들 덕에 신문사에 입사하던 시절을 생각합니다. 한국일보 입사시험 최종면접에서 뵈었던 장기영 사주님... 멋있는 언론인이고 배우고 싶은 선배였던 그 분, 이제는 남의 손에 넘어간 한국일보... 정권의 나팔수가 된 조선일보...마음이 착잡합니다. 마침 한국일보의 임종건 선배가 자유칼럼에 장기영 사주님 얘기를 쓰셨기에 여기 옮겨둡니다. 기사의 '제목은 시詩'라고 하셨던 장기영 사주님, 당신을 언제까지나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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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우영(方又榮)

2016.05.17

지난 8일 조선일보 방우영 고문이 88세로 타계했습니다. 고인과는 면식이 없는 사이지만 언론인들의 대화 속에 심심찮게 회자됐던 이름이었으므로 저에게도 들은 얘기는 제법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8년 전 그의 팔순을 기념하여 출간된 ‘나는 아침이 두려웠다’는 제목의 자서전을 읽고 나서 저는 고인을 조금 새롭게 보게 됐습니다. 저는 자서전을 잘 읽지 않는 편인데 읽다보면 솔직함보다 자기자랑처럼 여겨지는 대목이 많아 눈에 거슬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자서전에도 그렇게 여겨질 듯한 대목이 없지 않았고, 언론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던 ‘청와대 스캔들’에 대한 기술도 없었지만 단숨에 읽었을 정도로 흥미진진한 내용이었습니다. 읽는 내내 제가 가장 관심을 가졌던 것은 ‘그는 왜 아침이 두려웠을까?’였습니다.

책의 마지막 부분 ‘나의 경쟁자, 나의 스승’ 편에서 ‘두려운 상대이자 본받고 싶었던 선배 장기영’ ‘아침마다 조선일보가 아닌 한국일보를 먼저 읽어’라는 소제목의 글에 이르러서야 궁금증이 풀렸습니다.

이 대목에서 고인은 1977년 4월 11일 새벽 한국일보 창업자 백상 장기영의 별세 소식을 자택에서 비상전화로 연락받고 난 뒤 심경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고 방우영 조선일보 고문의 자서전 ‘나는 아침이 두려웠다’의 표지.

‘백상 장기영, 그는 내가 신문사를 경영하면서 가장 두려운 존재였고, 본받을 선배였으며, 실질적인 스승이었고, 힘겹게 겨루어야 할 상대였다. 나는 신문사 경영에 뛰어든 순간부터 아침에 눈을 뜨면 조선일보보다 한국일보를 먼저 손에 들었다. 한국일보가 특종하면 하루 종일 우울했고, 우리 신문이 앞서면 기분 좋게 아침밥을 먹었다. 그런 세월이 10년 이상 갔다.’

조선일보 사장으로서 자신의 약점을 자서전의 제목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런 세월 10년’은 조간은 조선일보와 한국일보, 석간은 동아일보 중앙일보가 경쟁하던 조석간 체제의 시대였습니다. 고인은 한국일보와 한국일보의 창업자 장기영을 두려워했다는 얘기였습니다.

오늘날 부동의 일등 신문으로 평가받는 조선일보인 만큼 자랑하고 싶은 얘기도 많을 터이지만 ‘4등 신문’으로 경쟁지 보기가 두려웠던 시절을 기억하는 그의 자세에서 대인의 풍모가 느껴졌습니다. 제가 그 책을 단숨에 읽었던 것도 글 속에 배어 있는 그런 솔직함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에게 장기영은 두렵고 힘겨운 상대만이 아니라 ‘본받을 선배’였고, ‘실질적인 스승’이었습니다. 그의 장기영에 대한 이같은 인상은 장기영이 한국일보를 창간하기에 앞서 1952년부터 1954년까지 2년여 동안 조선일보 사장을 지내던 때 형성됐을 것입니다.

장기영 사장 시절 조선일보 기자(교열부 소속)가 된 방우영에게 그 2년은 장기영의 경영방법을 곁에서 보고 익히는 절호의 기회였을 것입니다. 방우영이 뒷날 조선일보 사장이 된 뒤 발휘한 경영수완은 장기영이 한국일보 사장으로 발휘한 수완과 여러모로 닮은꼴이었습니다.    

자서전에서 고인은 장기영 체제로 신문사 경영은 안정을 찾아갔지만 2년 동안 빚이 무려 2억 원에 이르게 돼 그대로 두었다가는 신문사 소유권이 넘어갈 판이어서 장기영을 내보냈다고 썼습니다. 이 부분은 2010년에 발간된 ‘조선일보 90년사’에서도 좀 더 자세히 되풀이 기술됐습니다.

한국일보 사우회는 장기영 사장체제에서 조선일보 사세가 발행부수는 350%, 지대수입은 640%가 각각 신장했다고 기록하면서 다른 한편에선 빚만 늘린 사람으로 폄하한 것은 부당한 처사임을 지적, 시정을 촉구하는 항의서를 조선일보에 보냈습니다.

이에 대해 조선일보는 배포되지 않은 책에선 그 대목을 수정했다며 수정본을  한국일보 측에 보내왔습니다. 당시 방 고문이 이에 대해 보고를 받았다면 분명 ‘잘한 일’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방우영 자서전에서 장기영 부음 대목은 이렇게 마무리됩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나는 한참을 그대로 서 있었다. 창밖에는 마악 물이 오른 연초록 버들가지들이 눈부셨다. 눈을 감고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장기영을 두려워하면서 열심히 그를 배웠던 방우영에 의해 조선일보는 일등 신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장기영의 신문, 그리고 제가 36년간 몸담았던 한국일보는 이제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39년의 시차를 두고 이 초록의 계절에 이승을 뜬 한국 언론의 두 거목이 저승에서 만나 무슨 얘기를 나누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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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임종건

필자는 1970년 중앙대 신문학과를 나왔으며 한국일보사와 자매지 서울경제의 여러 부서에서 기자와 데스크를 거쳤고, 서울경제 논설실장 및 사장을 지냈습니다. 한남대 교수, 한국신문윤리위 위원 및 감사를 지냈고, 일요신문 일요칼럼의 필자입니다. 필명인 드라이 펜(Dry Pen)처럼 사실에 바탕한 글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