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문장

앙드레 말로와 독일인의 문화 사랑(2016년 5월 16일)

divicom 2016. 5. 16. 08:11

앙드레 말로 하면 '인간의 조건'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저는 '사랑의 풍토'를 더욱 좋아했습니다. 소설만 잘 쓰기도 어려운데 소설도 잘 쓰고 장관 노릇도 잘한 사람, 그야말로 타고난 그릇이 다른 것이겠지요. 


자유칼럼의 이성낙 선생이 앙드레 말로 얘기를 쓰셨기에 여기 옮겨둡니다. 한 해 1억 명 넘는 사람들이 독일의 박물관을 찾는다는 얘기가 인상적입니다. 독일 국민... '큰 나무 아래를 걸으니 내 키가 커졌다'는 말의 의미를 아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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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라 팔 수 없었다”

2016.05.16


필자에게는 ‘문화 정책’ 하면 떠오르는 걸출한 인물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1960년대에 프랑스 문화를 크게 융성시킨 앙드레 말로(Andr Malraux, 1901~1976)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 한 특정 문화 정책 입안자의 영향력을 훌쩍 넘어 한 사회가 문화우선주의에 공감대를 형성한 결과를 확인하는 특별한 자리가 있었습니다.

지난달 독일연방 상원의장 겸 작센(Sachsen) 주 총리인 슈타니슬라브 틸리히(Stanislaw Tillich)의 한국 방문에 맞춰 독일 대사관저에서 롤프 마파엘(Rolf Mafael) 주한독일대사가 주최한 환영 리셉션이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인사말을 하던 중 틸리히 상원의장이 작센 주에서 가져온 샴페인으로 건배를 제의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독일 통일 후 옛 동독 작센 주의 수많은 기업을 민영화하면서 두 곳을 제외했는데, 그중 하나가 ‘와인 재배 기업(Winzer)’입니다.” 요컨대 독일 회사의 샴페인으로 건배하며 홍보를 살짝 곁들인 것입니다.

인사말이 끝난 후 필자는 틸리히 상원의장에게 물었습니다. “두 개의 기업을 민영화하지 않았다고 하셨는데 다른 하나는 어떤 기업입니까?” 그러자 상원의장의 입에서 ‘마이센 도자기(Meissen Porzellan)’라는 대답이 나왔습니다. 별로 놀라울 것도 없는 얘기였습니다. 그런데 필자가 무심코 왜 ‘마이센 도자기’냐고 묻자 의외의 대답이 나왔습니다. “지난 300여 년간 작센 주민과 함께해온 문화라 팔 수 없었죠.” 무척이나 자랑스럽게 말하는 그 얘기를 듣는 순간, 필자는 소름이 돋을 만큼 깜짝 놀랐습니다. 문화를 사랑하는 그의 당당하고 순박한 마음이 그대로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주해: 마이센 도자기는 1710년 작센의 드레스덴에서 시작되었다.)

잠시 후, 필자는 수행한 디르크 힐베르트(Dirk Hilbert) 드레스덴 시장에게 ‘와인 재배 기업’은 왜 매각 대상에서 제외했는지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허를 찌르는 대답이 나왔습니다. “와인 재배 지역이 비교적 높은 구릉 지대에 있는데, 그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팔 수는 없었죠.” 요컨대 아무리 뛰어난 자연 경관도 개인 소유가 되면 결국 파괴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얘기였습니다. 몇몇 사람이 문화 정책을 세우고 구호를 외친다고 해서 문화가 융성해질 수 없다는 생생한 교훈을 느낀 자리였습니다.

두 분의 얘기를 듣고 몇 년 전 독일 박물관 안내 서적을 읽다가 “매년 1억 명(Ueber 100 Millionen Menschen…) 넘는 관람객이 독일 내 박물관을 방문한다”(Museumfuehrer, Die Zeit, 2010)는 구절을 본 기억이 났습니다. 놀라우면서도 한편으론 왠지 실감이 나지 않던 내용이었습니다. ‘박물관과 각종 미술 전시회를 방문하는 사람이 한 해에 무려 1억 명 이상이라고?’ 우리네 현실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어 혹시라도 필자의 셈법이 틀렸나 싶어 문장을 다시 챙겨보기까지 했습니다.

안내 책자를 쓴 한노 라우테르베르크(Hanno Rauterberg)는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이제는 축구장을 찾는 사람보다 전시회를 찾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박물관이 이 시대의 교육(Bildung)과 누림(Genuss)의 매체가 되었다.” 우리가 조용히 반추하고 또 반추해야 할 대목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래전 필자는 남부 독일 뮌헨에서 단체로 밤새 버스를 타고 파리에서 열린 ‘피카소의 전시’를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독일이 자랑하는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uerer) 탄생 500주년을 기리는 뉘른베르크(Nrnberg) 전시회를 찾아간 기억도 있습니다. 그리고 뮌헨에서 열린 프리덴라이히 훈데르트바서(Friedenreich Hundertwasser, 1928~2000) 전시회를 보기 위해 북독일에서 온 친구와 함께 두 시간 넘게 줄을 서서 전시장에 입장하기도 했습니다. 독일에서는 이처럼 문화 행사에 적극 참여하는 사회 정서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박물관이나 미술관 방문자 수가 연간 1억 명이 넘는다는 통계 수치가 결코 과장은 아닐 것입니다. 더욱이 약 6.000개에 크고 작은 미술관 또는 박물관이 독일 전역에 널려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충분히 수긍할 만한 수치입니다.

그렇다면 이 엄청난 수치가 함축하고 있는 뜻은 무엇일까? 그건 사회 전체가 문화예술을 국가 동력 산업으로 육성해야 한다는 공감대를 가져야만 그와 같은 결과를 달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필자는 다시금 20세기 프랑스 문화 정책에 큰 획을 그은 앙드레 말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화부 장관을 역임한 말로는 일찍이 1933년 《인간의 조건》이란 작품을 발표하며 일약 ‘행동하는 사상가’로 부상해 많은 일화를 남긴 인물이기도 합니다. 특히 문화부 장관 시절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 대통령과의 일화는 유명합니다. “이웃 나라 독일의 아우토반처럼 프랑스도 고속도로를 건설해야 하지 않겠소?” 드골 대통령의 말에 말로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25km의 고속도로 건설비를 들여 곳곳에 문화 회관을 지으면 프랑스는 10년 내에 세계에서 첫째가는 문화국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드골 대통령이 고개를 끄떡이며 말로의 의견에 동의한 것은 물론입니다.

그 후 앙드레 말로는 소신대로 지방 곳곳에 문화 전당을 세우며 프랑스를 자신이 꿈꾼 문화 강국으로 이끈 결과, 프랑스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우뚝 섰습니다.

이와 관련해 우리의 현실을 돌이켜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예술가들은 세계 여러 문화예술 현장에서 뛰어난 활약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국가 차원의 정책적 배려에 힘입어 그렇게 되었다기보다 예술가 개개인의 눈물 나는 노력과 희생의 결과라는 점을 묵과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아쉽고 서글픈 우리의 현실입니다.

많이 늦었지만 이제라도 우리 정치인의 입에서 “문화라 팔 수 없었다”는 말이 자연스레 나올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정신이 우리 눈앞에 아주 다른 세상을 펼쳐 보일 것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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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이성낙

뮌헨의과대 졸업. 프랑크푸르트대 피부과학 교수, 연세대 의대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역임.
현재 가천대 명예총장, 의ㆍ약사평론가회 회장, (사)현대미술관회 회장, (재)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