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한글날 태극기 (2015년 10월 5일)

divicom 2015. 10. 5. 08:08

지난 토요일은 개천절이었지만 태극기를 내건 집은 거의 없었습니다. 언론에서도 개천절에 관한 얘기는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개천절을 무시하고, 광복 후 정부 수립만을 강조하는 건 이 나라의 긴 역사를 애써 줄여 '어린' 나라로 만드는 소치이니 참으로 통탄할 일입니다. 


다가오는 금요일은 한글날입니다. 1991년 공휴일이 너무 많아 경제에 지장을 초래한다는 이유로 공휴일에서 제외되었던 한글날은 2013년에 다시 공휴일이 되었는데, 개천절과 마찬가지로 한글날도 이날의 의미를 생각하는 사람보다는 이날이 공휴일임만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며칠 전 식당에서 어린 아이가 제 엄마에게 끝없이 영어로 떠들어 칭찬받는 것을 본 후라 그런지, 한글과 우리말의 현재와 미래가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한글날에 태극기를 게양하면서 아주 잠시라도 우리말과 글에 대해 생각해보았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 글 한 편을 쓰려했는데, 2012년 한글날에 이미 그런 내용을 쓴 적이 있기에 오늘에 맞게 조금 고쳐 옮겨둡니다. 



오는 금요일은 한글날입니다. 저는 이날이 그 어느 날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를 '우리'로 만들어준 글자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우리글과 말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가지게 된 건 오랜 기간 영어로 밥을 먹고 살았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언어는 사고(思考)를 규정합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는 건 엉망이 된 언어생활과 관계가 있을 겁니다.


제가 대학교 2학년 때 공부했던 영어책을 우연히 들여다본 적이 있습니다. 시대를 초월해 잘 쓴 글들을 모아놓은 책인데, 제가 그 책으로 공부한 게 1970년대이니 그 전에 쓰인 글들이 실려 있겠지요. 놀라운 것은 그 책의 영어가 지금 사용되는 영어와 거의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말은 우리 사회만큼이나 변화가 빨라 1990년 대에 쓴 글만 해도 요즘 보면 고어 같은 느낌을 줍니다. 영어 교육을 강조하다 보니 사람들의 말투가 영어식이 되었습니다. 불필요한 부사의 사용이 늘고 수동태로 말하거나 글을 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동사는 줄어들고 명사와 명사형을 쓰는 일이 잦아 문장이 생동감이 없고 복잡합니다.   


장음과 단음을 구별하지 못하는 방송국 아나운서들을 보면 우리말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해도 얼굴이 예쁘면 뽑히는 건가, 고개를 갸웃하게 됩니다. 인터넷은 말할 것도 없고 신문 기사에도 비문이 흔합니다. 예전엔 기자가 실수를 해도 선배들의 눈과 편집과정을 거치며 제대로 된 문장이 되어 나갔는데 이젠 그런 과정이 생략된 걸까요? 


제게 힘이 있다면, 우리말 발음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나운서들은 정확하게 발음하게 될 때까지 방송 출연을 금지시키고 교육을 받게 하겠습니다. 한글날엔 국가적 기념일에 걸맞게 대대적인 행사를 벌이고, 우리나라의 모든 간판은 우리말로 쓰게 하고 꼭 외국어를 쓰고 싶으면 우리말 간판 옆에 작은 글씨로 쓰게 하겠습니다. 대학입시 등 주요한 시험에서는 국어 성적이 좋은 사람에게 가산점을 주고, 회사 입사시험에서도 그렇게 하도록 기업들을 독려하겠습니다.  


그러면 국민의 영어 실력이 줄지 않겠느냐고요? 국민의 영어 실력이 줄면 외국 관광객들이 줄어들까봐 걱정이 된다고요? 우리나라는 미국이나 영국의 식민지가 아닙니다. 외국인이 우리나라에 와서 고생하는 건 당연합니다. 우리가 외국에 나가면 고생하는 것과 같습니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은 우리나라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누구나 집을 떠나면 고생이라는 걸 알면서도 여행을 떠납니다.


자기 나라가 제일 편한 이유는 무엇보다 모국어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모국어만 하는 사람은 불편을 감수해야 합니다. 간판에도 외국어가 많고 방송에 출연하는 사람들도 외국어 쓰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정부 또한 외국어를 남발하기 때문입니다. 모국어를 홀대하는 나라는 남의 나라 식민지와 다를 것 없습니다. 언어가 사고를 규정하니까요. 


이 글을 읽는 분들이 모두 태극기를 내걸었으면 좋겠습니다. 때로는 정부가 국민을 이끌지만 때로는 국민이 정부를 이끌어야 합니다. 집집마다 태극기가 펄럭이면 외국 관광객들이 궁금해할 거고, 그렇게 되면 태극기와 한글에 대한 외국인들의 관심도 높아질 겁니다. 제 569돌 한글날,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이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