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가 뒷걸음질을 친다고 생각하는 게 저 한 사람은 아니겠지요? 언제부턴가 그런 생각이 떠나지 않았고,
그 생각의 끝에서 책 한 권을 상재했습니다. <밥상에서 세상으로>라는 제목의 책으로, 부제는 '아버지가 가르쳐주신 것들'입니다.
사람은 부모에게서 비롯되고 세상은 집에서 시작하니, 아버지가 아버지답고 어머니가 어머니다우면 세상이 뒷걸음질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거라는 생각을 풀어놓은 것입니다.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은데 어찌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다소나마 도움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책은 1부 '아버지가 가르쳐주신 것들'과, 2부 '살아오며 배운 것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1부는 제 아버지 김 경남 씨가 저를 키운 방식을 중심으로 쓴 것이고, 2부는 지난 몇 해 동안 한국일보, 한겨레신문, 자유칼럼, tbs '즐거운 산책(FM95.1M Hz)의 제 칼럼 '들여다보기', 그리고 이 블로그에 썼던 글 중에서 고른 것입니다. 이 책을 펴낸 출판사 '살림터'는 올바른 교육을 통해 한국 사회의 진화를 도모하는 교육 전문 출판사입니다. 좋은 책만을 내온 '살림터'가 제 책을 내주셔서 깊이 감사합니다. 아래에 <밥상에서 세상으로>의 머리글을 조금 줄여 옮겨둡니다.
머리글
올해는 이 나라가 일제에서 해방된 지 70년이 되는 해입니다. 지난 70년간 한국이 농경국가에서 첨단산업국가로 변하는 동안 한국인 또한 숱한 변화를 겪었습니다. 한때는 초등학교만 졸업해도 배운 사람으로 대접받았지만 이제는 대학을 졸업해도 많이 배운 것으로 생각되지 않습니다. 나라는 70년 전보다 훨씬 편리하고 부유해졌지만, 나라의 부富가 특정계층으로 몰리면서 상대적 빈곤을 느끼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돈과 출세가 만인의 목표가 되면서 부패가 판치고 양심은 화석화되니 오늘의 한국은 그 어느 때보다 위험합니다.
소위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부의 책무는 국민의 안녕을 지키고 행복을 증진시키는 것이지만, 언제부터인가 이 나라의 정부는 그 기본적 기능을 상실한 채 힘 가진 소수가 힘없는 다수 위에 군림하며 힘을 세습하도록 돕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개천에서 용’이 나오는 일이 없어져 계층 상승은 불가능한 것이 되었고, 높은 계층에 속하지 못한 대다수의 국민들은 생존 자체에 대한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생활을 유지하는 세 가지 요소 — 의衣, 식食, 주住 --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식’, 즉 밥입니다. 제 집이 아닌 곳에서 잘 수도 있고 남이 버린 옷을 입고도 살 수 있지만 음식을 먹지 않거나 제대로 먹지 못하면 생존 자체가 위협을 받으니까요. ‘의, 식, 주’ 중 ‘식’의 시대가 오고, 가장 보편적 위로 매체인 텔레비전에서 앞 다투어 요리 프로그램을 방영하는 건 그만큼 사는 게 힘들어졌다는 얘기이겠지요. 2015년 한국은 ‘요리 세상’입니다.
상황이 변했으니 살아가는 방식도 변해야 합니다. 자라나는 세대에게 살아가는 방식을 가르치는 것이 교육이니 교육 또한 변해야 합니다. 밥이 없어 물만 마시고도 밥 먹은 사람처럼 이를 쑤시던 ‘체면’과 ‘콩 한쪽도 나누어 먹는 정’을 중시하던 한국인들은, 1997년 말 ‘아이엠에프IMF’ 금융위기를 기점으로 체면이나 정보다 ‘돈’을 모으는 것과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게 되었고, 지난 십여 년 동안 '부자와 승자가 되기 위한 교육’에 몰두했습니다. 성적만 좋으면 다른 것은 아무래도 좋다는 분위기가 퍼지면서, ‘성적과 인간성은 반비례한다.’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그러나 작년 4월의 세월호 사건을 비롯한 무수한 사건과 사고들은 우리에게 ‘언제까지 그렇게 살 거냐?’고 묻고 있습니다. ‘세상이 거꾸로 간다’, ‘사회가 뒷걸음질 치고 있다’, ‘이게 대체 나라인가?’ 하는 탄식과 자조가 섞인 말과 함께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하는 반성의 목소리도 들립니다. 국민소득은 높아졌지만 불행한 국민은 늘고, 평균수명은 길어졌지만 행복한 시간이 늘어난 것은 아닙니다. 교육은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하지만 길에 침 뱉는 사람들은 그 어느 시대보다 많고, ‘21세기는 창의력의 시대’라는 말을 조롱하듯 복고의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정말 무엇이 잘못된 걸까요? 이 위험하고 위태로운 나라에서 어떻게 해야 그나마 재미있고 행복하게 자연수명을 살아낼 수 있을까요?
나라가 이 모양이 된 건 ‘경제가 우선’이라는 기치 아래 사람보다 돈을 중시한 정치 탓이며 정치지도자들 때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소위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인들은 선거를 통해 당선되니 그들이 잘못한다면 그들을 선출한 국민이 잘못한 것이겠지요.(물론 선거부정이 있었다면 다르겠지만요.) 대통령과 장관들이 무능하고 국회의원들이 이기적일 때, 누가 그들에게 공직과 권력을 부여했는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바로 국민입니다.
‘자선은 집에서 시작된다Charity begins at home.’는 말도 있지만, 인생의 모든 것은 집, 곧 가정에서 시작됩니다. 아버지가 아버지답고 어머니가 어머니다우면 아들딸은 사람다운 사람들로 자라나 살 만한 세상을 이룹니다. 지금 한국사회의 문제를 파고 들어가 보면, 그 뿌리에는 아버지답지 못한 아버지와 어머니답지 못한 어머니가 있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가장 먼저 ‘돈 벌어다주는 기계 혹은 아저씨’로 전락한 아버지들이 가정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되찾아야 합니다.
저는 ‘아버지’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뻐근해집니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 ‘시냇물은 졸졸졸졸……’에 맞춰 아버지와 춤추던 일,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와 산책하던 언덕길, 해 지는 것도 모르고 책에 빠져있으면 ‘반짝’ 불 켜서 책상 위의 어둠을 쫓아주시던 일, 중고등학교 때 아버지와 밥을 먹으며 세상 얘기를 듣던 식탁, 대학신입생 딸에게 처음 걸려온 남학생의 전화를 받고 즐겁게 웃으시던 모습, 외출 준비하는 딸에게 “다리가 젓가락 같으니 검은 스타킹은 신지 마라.” 하고 충고하시던 일까지……. 아버지는 때로는 스승으로 때로는 친구로 제 삶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친구들과 웃고 떠들다가 아버지 얘기를 하는 일도 흔합니다. 누군가가 좋아하는 일에 너무 깊이 빠져 건강을 해칠까 염려되면 아버지의 말씀을 전해줍니다. “좋아서 하는 일도 건강을 해친다.” 어려운 일 지나가고 요즘은 일이 잘 되어간다고 신이 난 친구에게도 아버지의 말씀을 해주게 됩니다. “역경에 인내는 누구나 하지만 순경順境에 근신은 아무나 못한다.” 나라에 대한 걱정으로 분노하고 한숨 쉬다 결국 소화불량으로 고생할 때도 아버지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지나친 애국은 건강을 해친다.”
아버지 얘기를 하다 보면 아버지 자랑이 되니 친구들에게 미안합니다. 어느 날 직장 후배와 아버지 얘기를 하는데 그가 문득 “에이, 그런 아버지가 어디 있어요?” 하고 고개를 저었습니다. 당시엔 서운했지만 나중에 후배가 자기 아버지에 대해 얘기하는 걸 들으니 그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 이해가 되면서 제 아버지 같은 아버지를 만난 게 행운이란 걸 새삼 느꼈습니다.
이 책은 그 행운을 나누고 싶어 쓴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책의 태어남을 도왔는데, 특히 ‘아름다운 서당’의 대학생들을 비롯한 젊은 친구들의 도움이 컸습니다. 그 친구들과 책을 읽고 얘기를 나누면서 지금 우리나라에는 ‘가정’은 있으나 ‘가정교육’은 없고, ‘성적’은 있으나 ‘공부’는 없고, ‘지식’은 있으나 ‘상식’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좋은 부모를 만나는 건 ‘운’이지만 좋은 부모가 되는 건 ‘노력’이고, 좋은 부모를 만나지 못한 사람도 좋은 부모가 될 수는 있습니다. 이 책이 좋은 부모가 되고 싶은 사람들을 돕는 ‘작은 지침서’가 되면 좋겠습니다...
인생은 요리와 같습니다. 보기는 좋아도 맛없는 요리가 있고, 그저 그래 보이는데 혀를 놀라게 하는 요리도 있습니다. 훌륭한 요리사는 재료의 맛을 살려 보기도 좋고 맛도 좋은 요리를 만들어내는 사람입니다. 인생을 요리라 하면 아버지와 어머니는 재료를 제공하고 요리법을 가르쳐주는 사람입니다. 유전자라는 재료는 정해져 있지만 요리법은 다양합니다. 자녀가 어떤 유전자를 타고 났든, 보기에도 좋고 맛도 좋은 요리와 같은 인생을 살게 되는 데는 부모의 요리법이 결정적입니다. 특히 성인이 되기 전 인격이 형성되는 시기formative years의 요리법이 가장 중요하겠지요. 이 책의 독자들이 최고의 인생요리사가 되어 맛없는 세상에서도 맛있는 인생을 사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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