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칼럼

한 잔의 추억 (2009년 12월 7일)

divicom 2009. 12. 29. 19:34

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12월엔 마시게 됩니다. 송년회, 망년회, 이름 붙은 모임부터 말 나온 김에 만들어진 이름 없는 모임까지, 일 년 내내 안 보고도 잘 살던 사람들이 해가 바뀌기 전에 만나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야단입니다. 음식점, 술집, 노래방... 경제 악화로 고전하던 접객업소들이 오랜만에 흥청입니다. 햅쌀 막걸리 열풍까지 불어 올 연말 취객은 더 늘어날 것 같습니다.

밤안개 낮게 깔린 길, 비틀거리는 사람들 사이를 걷다 보면 겨울 냄새 풍기던 이장희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늦은 밤 쓸쓸히 창가에 앉아
꺼져가는 불빛을 바라보며는
어디선가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려
취한 눈 크게 뜨고 바라보며는
반쯤 찬 술잔 위에 어리는 얼굴
마시자 한잔의 추억 마시자 한 잔의 술
마시자 마셔버리자...”

사랑, 추억, 분노... 한때는 취해야 할 이유가 사람의 수보다 많았었지만 이젠 취하지 않습니다. 이장희가 노래하듯 한 잔만 마십니다. 이장희는 이미 취한 눈으로 한 잔을 더 마시자고 하지만 저는 정말 한 잔만 마십니다. 적잖은 나이 덕일까요? 한 잔만 마셔도 원하는 시점, 원하는 공간으로 날아갈 수 있습니다. 혀를 적신 한 모금이 목 언덕을 넘어가면 몸도 마음도 어느새 황혼 같은 시간 속입니다. 다시 한 모금, 어디선가 날개를 펄럭이고 있던 죽음이 비둘기처럼 주변을 떠도니 삶이 문득 가볍습니다. 몸을 담그고 있어도 알 수 없는 현실, 술은 그 너머로 가는 아름다운 마차입니다.

그런데, 이 마차가 자꾸 비난의 대상이 됩니다. 내려야 할 때 내리지 않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술 때문에’ 하루 평균 열세 명이 죽고, 음주로 인한 사회경제적 비용이 연간 20조 원에 이른다고 합니다. 범죄자 열 명 중 두 명은 술에 취해 범죄를 저지르고, 살인범과 강간범은 열 중 넷이 술 마신 사람이라고 하지만 우리나라 국민의 알코올 소비는 늘기만 합니다. 2006년 317만 킬로리터였던 것이 2007년 329만 킬로리터, 2008년 339만 킬로리터가 되었습니다.

엊그제는 겨우 서른한 살 청년이 --평균수명이 여든에 육박하니 서른한 살은 참으로 청청한 나이입니다-- 술 마신 상태에서 여덟 살 난 여자 어린이를 성폭행하여 징역 20년을 선고받았습니다. 원래 알코올 의존증과 정신질환 치료 전력이 있던 사람이 술을 마시고 범죄를 저질렀다고 합니다. 전과가 있다는 말이 없는 걸 보면 초범인 것 같은데, 훨씬 잔인한 성범죄를 저지른 재범자 조두순에게 십이 년 형이 선고되었던 걸 생각하면, 법의 집행에도 운이 작용하나 봅니다.

현진건이 <술 권하는 사회>를 발표한 1921년이나 21세기 초입인 오늘에나 세상은 여전히 “본 정신 가지고” 살기 힘들어 사람들은 자꾸 취하려 합니다. 한 잔은 위로를 주지만 열 잔은 일탈을 부추긴다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마셔댑니다. 그러나 맨 정신으로 할 수 없는 일을 술 힘 빌려 하고, 술 깬 후에 술 핑계를 대는 사람들은 경멸을 일으킵니다. 특히 불혹을 넘긴 사람들이 술에 혹해 해선 안 될 일을 하면 조롱거리나 뒷담화의 대상이 되기 십상입니다.

송년 모임에서 누군가가 취한 목소리로 “야! 오늘 코가 비뚤어질 때까지 마셔보자!”고 소리치거든 “그만하고 노래하러 가자!”고 하십시오. 제주도 삼다수 몇 병 사들고 노래방으로 가서 이장희가 부르던 ‘한 잔의 추억’을 불러보십시오. 그리운 모습들을 떠올리며 속엣 소리를 털어내고 나면, 다음 날 아침 거울 속에서 제법 행복한 얼굴을 만나게 될 겁니다. 육십 가지 질병과 상해를 유발하는 알코올과 싸워 이긴 수십 억 세포들의 승리의 증거를.

“기나긴 겨울밤을 함께 지내며
소리 없는 흐느낌을 서로 달래며
마주치는 술잔 위에 흐르던 사연
흔들리는 불빛 위에 어리는 모습
그리운 그 얼굴을 술잔에 담네
마시자 한 잔의 추억 마시자 한 잔의 술
마시자 마셔버리자...”